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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8일 목요일

진정한 자유


인간은 통제 당하고 억압당할 때 심적으로 큰 고통을 느낍니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쟁취해 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자유'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포괄적 의미의 자유는 우리가 지켜야 할 지상최대의 가치입니다. 국가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에게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수준으로 시야를 낮춰봅시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종류는 아주 많습니다.

사유의 자유, 거주와 이동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등 모두 다 꺼내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자유를 나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가장 화두가 되었던 것은 '경제적 자유', '시간적 자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자유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두 가지만 좇으면 공허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를 얻게 되더라도 여전히 자유를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경제적 자유와 시간적 자유는 일부 정신적인 부분의 자유도 보장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물질', '시간', '공간', '육체'와 관련된 물리적 자유입니다.

더 나은 공간을 선택하고,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쓰며, 내 육체(+정신)를 조금 더 편안하게 보살피고자 하는 욕구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고도 여전히 자유를 갈구하고, 사랑을 갈구하며, 타인에게 눈치보는 삶을 살고, 더 높은 수준의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해 혈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봅니다.

왜 그런가 오래도록 생각을 해왔습니다. '절제부족', '탐욕'같은 단어들로는 생각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문득 어떤 희미한 해법 근처에 다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욕먹을 자신과 비난을 감수할 자신이 없다."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래도 꽤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타인들에게 욕을 먹거나 비난을 당하는 것은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조차 기꺼이 감당해 낼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있을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 그 어딘가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현실과 괴리가 큰 럭셔리한 삶을 쉼없이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보다 3천 만원 짜리 낡은 지방 아파트에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사는 삶을 공유하는 독거노총각님이 진정한 '자유'라는 진리에 몇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경차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남들 보는 눈 때문에 포르쉐나 벤틀리 같은 브랜드로 다음 차량을 바꾼다면, 저는 아직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지 못한 속박된 사람인 것이지요.

물론 그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슈퍼카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페라리 296 GTB 정도는 우리가 군것질 하듯이 살 수 있는 재력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타인의 눈을 의식해서 군침만 다시며 제네시스를 타고 다닙니다. 그 역시 자유에 도달하지 못하고 속박 당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 기분, 내 생각, 내 의사결정, 내 인생에 타인의 속박이나 시선 그리고 굴레의 영향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아야합니다. 그것이 자유로 가는 길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데도 스스로 만들어 놓은 무형의 정신적 감옥에 스스로 갇힌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야 자유의 길에 한발 내딛는 것이겠죠.

1,000억 부자에게 고개 숙이고, 서울대 출신에게 주눅들고, SPA 옷을 입는 것이 부끄럽고, 브랜드아파트에 살지 못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유의 반대편에 서서 속박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비난을 받을까, 사람들의 조롱을 당할까, 남들이 어떻게 볼까 싶어서 욕구를 감추고 살고 있나요? 하고 싶은 일을 주저하고 있나요? 자유의 반대편에 서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또 다른 인터넷 필명이 '보헤미안'입니다. 어쩌면 저도, 제가 갈구하는 보헤미안들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2년 12월 8일
송종식 드림


2021년 9월 23일 목요일

오징어게임, 돈과 인간 그리고 이념에 대한 잡생각 (Squid Game)

* 본 포스팅에는 결말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의 신작인 오징어게임을 보면서 부분적으로 세상살이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아주 높은 사고 수준을 요구하는 드라마는 아닙니다. 재미에 있어서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다소 뻔했습니다. 그래도 뻔한 내용에 뻔한 소리를 질러대는 드라마를 보면서 나름대로 인간들의 삶에 대해서 다시금 반추하는 기회로 삼아 보았습니다.

권력은 총과 돈, 격리에서 나온다


게임 참가자는 다수입니다. 게임 운영자들은 소수입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게임 운영자들이 다수의 참가자를 지배합니다. 그들을 굴복하게 만든 힘은 1차적으로는 총입니다. 총칼 앞에서 대부분은 굴복합니다. 그 다음 통치 수단은 바로 돈입니다. 참가자들 내면 깊숙한 곳의 탐욕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노예의 길로 걸어가게 만듭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역사는 늘 다수의 대중을 소수의 지배자가 총칼과 돈으로 지배해 왔음을 게임에서도 보여줍니다. 금권과 군사권을 쥔자가 인간사회의 권력을 쥡니다.

중간에 몇번의 사소한 봉기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총칼 앞에서 곧 진압됩니다. 만약, 대규모 봉기가 성공했더라도 그 다음은 고립에 대한 이슈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서울대 상우는 본인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이룬것인가?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인 증권맨 상우는 게임에서도 상위 0.43% 안에 들어갑니다. 참가자 465명 중 2등까지는 살아 남아서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상우는 매사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그는 게임 후반부로 갈수록 자기가 여기까지 살아 남아서 올라온 것은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행운은 전혀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이루었다고 강한 확신에 빠져 있는 상우를 통해서, 황동혁 감독은 실제 세상은 노력만으로 돌아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노력만을 강조하는 세태를 꼬집으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울대 상우는 자신을 친형처럼 믿고 따르던 알리를 속이고 배신하기도 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참가자를 밀어 추락사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식으로 게임의 최종 승리자 직전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서울대 상우에게는 그런것도 노력이면 노력이라고 믿는 게 아닐지 안타까웠습니다.

실제 극 막판에 기훈은 상우에게 말합니다.

"너처럼 그렇게 잘난 새끼가 왜 여기서 머리 나쁘고 능력도 없는 나하고 이러고 있냐"고.

바깥 세상에서 상우는 횡령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곡된 노력과 과도한 탐욕의 결과였습니다.

주인공 기훈은 본인의 노력만으로 465억 원을 얻은 것인가?


서울대 상우와 달리 기훈은 자신의 생존이 자기 능력 덕분이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다만, 게임 운영자들과 주변 사람들이 기훈을 부추기는 발언들을 합니다. 기훈이 파이널리스트까지 올라간 것은 누구의 덕도 아닌 기훈 본인의 노력 덕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기훈은 첫번째 게임에서 조기 탈락할 운명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외국인 노동자 알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첫번째 게임을 통과합니다. 이런식으로 기훈은 매순간 주변의 도움으로 '운 좋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운영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게임의 결과만을 중시해서 그 결과에 대한 몫은 오롯이 기훈의 몫이며 모두 기훈의 노력만으로 얻은 것이라고 치켜세웁니다.

노력 만능주의 사회, 결과주의 사회에 대한 감독님의 비판적인 의견이 느껴졌습니다.

작은 게임마저도 복잡계다


우리가 실제 살아가는 세상에 비하면 오징어게임에 등장하는 게임들은 조건도 심플하고, 결과도 심플합니다. 세상의 극히 일부분을 엄청나게 정말 엄청나게 축소시켜 놓은 작디작은 모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고작 465명이 참가하는, 룰조차 너무 간단한 이 게임의 결과는 복잡계의 산물로 탄생합니다.

이를테면, 기훈과 상우가 최종 우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론상 465명이 만들 수 있는 21만 5,000가지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을 얻었다는 이야기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게임에 적용되는 여러가지 확률까지 더하면 이들이 살아 남아서 상금을 거머 쥘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확률에 도전하는 지능 또는 성향의 문제가 있으니 참가자들은 바깥에서도 늘 돈 때문에 걱정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도박성향은 인생패망의 지름길입니다.

어쨌든 강화유리와 일반유리를 구분하는 게임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기훈이 이 게임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앞선 플레이어들이 일으킨 여러가지 효과 덕분입니다. 그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얽히고 설킨 관계들, 그리고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의 페르소나들. 그런 것들이 짬뽕처럼 조화되어 기훈이 해당 게임을 통과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 변수들 중 작은 것 하나만 틀어졌어도 기훈은 해당 게임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작은 게임조차도 매우 복잡계입니다. 하물며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훨씬 더 복잡계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매사 노력하고 옳은 구조와 틀을 짜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개인의 모든 성공을 오롯이 자기 자신의 공덕으로만 돌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반대로 모든 실패 역시 내탓으로만 돌리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겸손과 용기, 그리고 자존감을 잘 믹스하여 현명하게 살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요.

가난한 자와 부자의 공통점에 대한 1번 할아버지의 뼈 있는 이야기


1번 할아버지는 극 후반부에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가난한 자와 돈이 넘쳐서 감당이 안되는 부자의 공통점은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가난한 사람은 삶이 지옥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생존만을 위해서 하루하루 살아 나가야 하니 삶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올라가고 싶은 이상이 높을수록 더욱 그렇겠죠.

부자들 역시 다른 쪽으로 삶이 무료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극중에 나오는 VIP들 정도 되는 재력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원하는 집, 차, 심지어 회사나 미녀, 맛있는 음식..? 그 무엇도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한 희망이 삶의 동력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VIP들은 그런 간절함이 전혀 없습니다. 원하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삶이 무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징어게임 드라마에서 이 부자들은 자신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대량살상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실제 현실 세계에서 인성이 망가진 일부 부자들은 대부분 주색에 빠지거나 주색 조차 지루하게 느껴지면 마약과 같은 향정신성 의약품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확실한 삶의 나침반이 없이 단지 명문대 입학만이 목적인 수험생은 목표로 하는 명문대에 입학하는 순간 목적이 달성되며 삶의 방향타를 잃어 버립니다.

강력한 기대감을 모멘텀으로 품은 주식은 그 모멘텀이 실현되면 되레 주가가 폭락합니다.

오로지 인생의 목표가 돈인 사람은 실제 돈을 손에 쥐고 나면 위와 같이 망가지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회복탄력성과 평균회귀 능력이 아주 좋습니다. 큰 사고를 겪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불행은 잊혀 집니다. 큰 행운을 얻어도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기쁨과 슬픔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극중 VIP들과 같이 반사회적 행동들을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에는 돈미새들이 많습니다. 돈미새에 해당하는 분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부분들이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큰 부를 얻고도 매일같이 하하하 웃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자 지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 동안 번돈을 사회에 돌려주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청년 사업가들에게 투자와 멘토링을 하고, 대중들을 상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사회의 많은 부분에 알게 모르게 기부를 하면서 유의미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부자가 되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힌트를 얻는 것도 좋아보입니다.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VIP들처럼 극단의 쾌락을 좇다가 살인기계가 되거나, 현실속에서 주색과 마약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돈을 좇는 것도 좋지만, 삶의 본질에 대해서도 늘 사색하고 통찰하는 시간들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자가 아니지만 제 경우에 추천드리는 것은 매일매일의 소일거리들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블로그에 글을 매일 쓰는 것, 책을 써 보는 것, 집 앞의 정원과 화단을 애정을 갖고 꾸며 보는 것, 코딩을 배워서 앱을 만들어 보는 것, 악기를 배우는 것 등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소소하지만 연속적인 행복의 요소들은 정말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네 삶이 어린 아이들 놀이나 쇼 같은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집니다. 아수라장이 되고 여기저기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배경음악은 해맑기만 합니다. 거대한 수용소이자 살상의 장소는 아이들 장난감 같은 것들이 널부러져 있고, 색감도 러블리 하기만 합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모두의 삶을 아이들의 장난 수준으로 바라 볼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그런데, 오징어게임의 감독님이 연출하신 분위기와 매우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회사에 출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차가 매우 막혔습니다.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는 것 모든게 꾸며진 연극같다"

'소중한 내 삶을 왜 이렇게 정체된 도로 위에서 보내야 하는지. 저 수 많은 사람들은 또 왜 그래야 하는지. 정말로 먹고 사는 문제가 이렇게 잠을 줄여가면서 치열하게 살아야만 해결되는 문제인지. 우리는 누구의 통제로, 무엇의 지시로 이렇게 레밍떼처럼 아침 저녁으로 삶을 버려 가며 이동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출퇴근을 안하면 안되는지. 진학, 취업, 출퇴근.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이 모든 틀을 깨고 나가면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닌지?'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외의로 먹고 살기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이 거대한 연극같은 세상에 그렇게 발버둥치고 매달리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게 연극이고 쇼라고 생각해보면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뭔가 명확해지는 아이디어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어나가고, 피가 난무하는 상황과 달리 해맑고 밝기만 한 오징어게임의 연출을 보면서 묘하게 그때 했던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시스템이 대중을 조종하고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인간의 본성은 단지 선과 악으로만 구분짓기는 어렵습니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 먹는다고 해서 그것을 악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고도화 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본능을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의사결정의 펀더멘털은 결국에는 본성에서 나옵니다.

오징어게임과 같이 극단적 환경에서는 이런 태도가 가슴 속 바깥으로 꺼내져서 적나라하게 표출됩니다.

단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밀린 월급만을 받기를 원했던 알리는 본의 아니게 사장을 장애인으로 만듭니다. 탈북녀 새벽은 탈북 브로커에게 속아서 모은 돈을 계속해서 사기를 당해 날려버립니다. 이런식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오징어게임에 들어오면서 말 그대로 생존본능을 발현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게임을 하나씩 진행하면서 점점 괴물로 변하갑니다.

다만, 사람들이 놓친 부분도 있습니다. 

모두가 협동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면 가급적 사망자를 줄이고 많은 사람들이 승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스템이 구상한대로 서로 죽이고 싸우면서 혼자만 살겠다고 사투를 벌입니다. 시스템의 계획에 말려든 것입니다. 

더욱 극단적인 카드도 있었습니다. 총칼이 무섭겠지만 게임 운영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판을 뒤집어 버릴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분열하고 반목하며 서로 믿지 못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통제 당하는 것 처럼요.

뭐, 민주국가들도 마찬가지기는 합니다. 시스템이 의도적인 메시지 하나를 대중에게 던지면 대중들을 그것을 덥썩 물고 서로 찢어 죽일 듯 싸우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분할하고 지배하는 것, 그리고 분할하고 통치하는 것'. 이것이 시스템과 지도자들이 대중들을 다루는(?) 기본 전략입니다. 인간은 서로 믿지 못하고, 반목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이것을 깨고 유일하게 협력의 열쇠를 쥐고 움직인 사람이 극중에서는 기훈이었습니다.

판을 뒤집는 게 쉬운 것도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극 중에서 룰브레이커가 몇 명 나옵니다. 의사가 한명 나오는데 게임 참가자이기도 했습니다. 게임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장기를 해체해서 게임 운영자들의 장기매매를 도와줍니다. 그러면서 다음 게임이 무엇인지 미리 내부자 정보를 획득해서 생존을 이어가죠. 편법을 쓰는 룰브레이커입니다. 그러나 그는 중도 탈락합니다.

경찰 준호는 애초에 게임 참가자도, 운영자도 아닌 스파이로 섬에 잠입합니다. 그 역시 룰브레이킹을 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운영자들을 하나씩 죽이지만 결국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채 프론트맨에 의해서 사망합니다.

총칼 앞에서 판을 뒤집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님을 새삼 느꼈습니다.

시스템은 당신의 성공을 두고 보지 않는다


유리판독 게임에서 전직 유리 기술자였던 참가자는 해당 게임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아주 쉽게 게임을 진행합니다. 그러나 시스템은 이를 두고 보지 않습니다. 즉시 해당 참가자가 찾아낸 비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예전에 인타임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가난한 노동자였던 저스틴 팀버레이커가 무명의 부자로부터 막대한 자산을 증여받자, 시스템은 즉시 그를 체포해서 자산(시간)을 도로 빼앗으려고 합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흙수저인 여러분이 크게 성공한다면, 수 많은 기득권이 당신이 이룬 성취를 빼앗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대처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늘 상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시스템은 흙수저가 어떤 치트키를 찾아서 크게 성공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보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일단 어떤 꼬투리라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기득권을 위한 시스템의 수호자인 국세청과 경검찰은 치트키를 발견해서 성공한 흙수저를 밟아 없애기 위해서 늘 출동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게임 규칙은 제 멋대로 변하고 일관성도 없었습니다. 현실에서도 그렇습니다. 최고 권력층에게 법은 자기보호 수단입니다. 자기 입맛대로 바꾸고 해석할 수 있으며 그다지 지키지 않아도 돈, 권력, 인맥으로 처벌을 피해갑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과 서민들에게는 엄격한 통제의 수단입니다. 시스템이 만든 사소한 규칙이라도 어기게 되면 칼같이 처벌합니다. 

또한, 누구하나가 성공하면 을끼리 꼬투리를 잡아서 시스템에게 신고하고 처벌을 종용하는 기현상도 생깁니다. 시스템은 즉시 성공한 을을 심판하기 위해 출동합니다.

퇴사할 것인가? 계속 다닐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라마에서 현실 세계를 회사라 치면, 오징어게임장은 퇴사한 사람들의 모임 같았습니다.

"회사는 정글이지만 밖은 지옥이다."

정말로 그것이 잘 묘사된 드라마였습니다. 경제적 자유, 시간적 자유, 파이어족이라는 단어에 세뇌된 분들은 한번쯤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유능하다고 알려졌던 몇몇 투자자들 조차도 지옥에서 견디지 못하고 유료리딩방 사업을 합니다. 지옥에서는 생존이 일단의 지상과제가 됩니다.

지나친 권선징악 (유비의 촉한은 망했지만, 기훈은 승리했다)


'사람들이 반목하지 않고 협력하여 승리를 이끌어 낸다'. 이상적입니다. 실제 세상도 그렇게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감독님의 그런 바람이 드라마에 녹여진 것 같습니다.

흡사,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과 오징어게임 감독님이 바라는 이상향이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관중 역시 지나친 현실주의자이자 실리주의자인 조조를 희대의 악당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후퇴하는 길에 노인과 여자 등 백성들까지 일일이 챙긴 유비는 한껏 치켜 세웠습니다.

오징어게임 감독님을 나관중이라고 본다면 주인공인 기훈은 유비 캐릭터에 가까웠습니다. 남을 이기려고 하지 않고 사람들을 도왔을 뿐인데, 게임의 승리자가 됩니다. 물론 기훈도 중간에 할아버지에게 한번 사기를 치기는 합니다만, 기훈은 전반적으로 살상도 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들을 도와 가면서 끝까지 함께 가기를 바라는 캐릭터입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디 그렇던가요?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유비형 캐릭터보다 조조형 캐릭터들이 더 성공합니다. 또한, 유비라고 어디 인의만 따질까요? 유비도 상당히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흉악한 권모술수를 가진 정치가였습니다.

드라마 초반부터 느껴지는 권선징악의 향기에서 저는 게임의 최종승자가 기훈이 될 것이라는 것을 사실 초반부터 알아버렸습니다. 권선징악을 기반으로 한 뻔한 전개는 김이 새는 부분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엎어버리자? 따뜻한 자본주의 체제를 이어가자?


저는 드라마 초반부에서 이 게임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축소한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이 게임을 기획한 것은 음모론자들이 좋아하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초권력, 초세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실제 VIP들이 서양인(G2국가인 중국인 1인 포함)인 것을 확인하고 더욱 그런 마음을 갖고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또한, '서양의 초국제세력이 만든 판에서 우리 동양인들이 죽어 나가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은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갖고 노는 설정은 아닐까?'라는 의구심도 마음 한켠에 가지고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너무 사악하고 나쁜 서구식 자본주의 혹은 초강대국들을 비판하기 위한 내용일까 싶었습니다.

나중에야 한국인인 1번 할아버지도 게임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왜 재미로 동족을 살상하며 쾌락을 즐긴 것인가?

1번 할아버지는 국가, 민족, 인권 같은 것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 이른바 글로벌 기업가로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호화병상에 누운 모습과 창 밖을 통해서 보이는 길거리 노숙자의 모습이 의미심장했죠. 그리고 그 글로벌 기업가는 세계의 다른 글로벌 자본과 연합하여 사람들을 주무른다는 설정으로도 보였습니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한 사람의 성공에는 수 많은 사람의 희생이 따른다."
"수 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 한 사람이 부를 독식한다."
"시작을 평등하게 하더라도 결과는 평등하지 못하다."

자본주의체제와 반자본주의 체제 모두에 대한 감독님의 회의주의가 느껴졌습니다.

다만, 따뜻한 세상을 만들자는 감독님의 메시지에는 공감을 했지만 부자를 지나치게 악한 모습으로 설정한 부분에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VIP들은 대체로 살이 쪘는데, 게임 참가자들은 모두 비쩍 마른 사람이 많은 설정도 그렇습니다.

또, 드라마에서는 부자, 남자, 서울대, 여의도 금융권, 대한민국, 중소기업 사장 등은 강자로 또는 악인으로 묘사됩니다. 탈북민, 이슬람계 외국인 노동자, 여자, 고졸 공장 노동자 등은 선하거나 의리가 있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묘하게 PC주의로 공격받을 수 있는 지점들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실제로는 악마같은 부자들보다 따뜻한 부자들이 더 많을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사람 목숨조차 자신들의 유희를 위한 장난감 정도로 생각한다는 설정도 섬짓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이 체제와 판을 뒤집어 버려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돈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당연히 안되겠죠. 그러나 드라마는 지나치게 돈과 금융,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주의와 악마화가 느껴져서 큰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아마 시즌2가 나온다면 시즌2에서는 기훈이 게임의 판을 뒤집는데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예측도 해보았습니다. VIP들을 사로잡은 뒤 게임판의 말로 만들어서 자신과 사람들이 당했던 것을 똑같이 되갚아 주면서 복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다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말로 세상이 바뀌는 걸까 싶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세상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2019년 10월 24일 목요일

자본주의 체제에 살면서 얻는 진정한 개인의 자유에 대해

뻔하고, 당연하고, 기본적이고, 누구나 아는 오래된 생각


한국 최고의 가치투자자 중 한 분인, 남산주성님의 개인 순자산 성장표
<출처 : 가치투자연구소 김태석>

1) 세상에 하나뿐인 가장 소중한 자원인 시간을 남에게 제공하면서 돈을 버는 건 한계가 명확하다. 나도 24시간, 이건희 회장님도 24시간을 산다. 그 매커니즘으론 돈을 벌 수 없다(노동). 남들의 시간과 노동력이 나를 위해 일하게 만들고 나는 그 위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투자). 한 사람에게서 1시간을 취할 수 있다면,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 24명만 있으면 나는 자유인이 된다. 그러니 직원이 10만명인 회사의 소유주가 된다면 무한 자유를 얻게 되는것이다.

2) 돈은 근육의 힘으로 버는게 아니라, 정신과 마음의 힘으로 버는 것이다.

3) 돈은 단리가 아니라 복리로 버는 것이다. 부를 쌓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엔진이다.

4) 돈은 내가 버는게 아니라 남들이 벌어 주는 것이다. 나는 올바른 판단만 내리면 된다.

5) 대부분은 용기가 없어서 노예가 된다.

6) 용기있는 사람 중 다수는 최소한의 공부와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에 패가망신한다.

7) 약간의 분별력과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충분하다.

8) 시간적 물리적 자유를 얻는다면 비로소 자아를 성찰하고 영적 자유를 얻기 위한 단계로 돌입할 수 있다. 먹고 사는데 치이면 인간의 기본권을 상실한다.

9) 약간의 여행, 약간의 휴식, 약간의 허세, 무리해서 사는 외제차.. 그런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회사의 멋진 시설들도 주주들의 소유이지 직원 소유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한다. 회사와 직원은 계약관계이고 회사의 주인은 주주다.

10)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그러므로 남들의 화려한 인스타에 주눅들거나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 허세로 포장된 삶을 한꺼풀 까보면 거진 다 별거 없다. 그러므로 나만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

2019년 6월 21일,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생각을 블로그로 옮김
송종식


2013년 2월 6일 수요일

자본주의, 성장, 평가.. 그리고 영원하고 궁극적인 것

들어가며..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하에 살고 있다. 체제의 단점이 많이 노출되고 있어서 이를 보완할 여러가지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체제의 뿌리가 당분간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몸에 흐르는 피는 돈이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돈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이고 물질과 서비스의 가격을 평가하고 교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능력 그 자체다.

사람들은 때로는 돈을 동경하고 또 때로는 돈의 미천함에 치를 떨기도 한다.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굳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돈을 부정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이 조개껍데기를 사용하면서 부터 현재까지 돈의 힘은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의 폐해도 있고 고쳐져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이번 에세이에서 그런 주제는 다루지 않고 조금 다른 포인트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핵심은 '성장'과 '평가'


'평가'라는 개념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 메카니즘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기업체를 먼저 살펴보자. 기업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생활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상품과 서비스를 적시에 공급하고 이윤을 추구한다.

기업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상품과 서비스를 잘 만들어서 소비자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팀을 만들어서 일을 한다. 각자 맡은 임무를 나눠 좋은 제품이 나오도록 힘을 합해 일한다. 팀에는 팀원도 있고 팀원들을 관리하는 매니저들도 있다. 팀단위 매니저 위에는 조직 규모에 따라서 본부장, 사장 등의 상부 인사들도 있다. 기업에 따라서 이 구조는 조금 다를수도 있다.

기업에서 팀 구성원들은 중간 관리자들에게 평가를 받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간혹 서로 평가를 주고 받기도 한다. 팀장은 다시 자신의 상부 보스에게 평가를 받고, 중간 보스들은 기업의 대표자에게 평가를 받는다.

기업에서는 돈을 쓰고 직원을 고용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제대로 효율을 내고 있는지 늘 체크해야 한다. 평가에 있어서 말단 사원이 가장 자유롭지 못하며 평가를 받기만 할 뿐 평가를 할 권한은 없다. 물론 최근에는 팀원이 팀장을 평가하는 회사들도 있지만 이는 보편적이지 못하며 팀장도 급여생활자라는 관점에서는 사원들끼리 평가를 주고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본이 사람을 평가한다


그러면 기업 구성원 모두를 평가하는 대표자는 평가에서 자유로울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대표자는 구성원들을 독려하고 회사내 여러가지 자원을 배분한다. 그렇게 생산한 제품의 평가를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받는다. 그리고 주주들에게 경영성과를 평가 받는다.

물론 지분 100%를 가지고 있는 경영자나 개인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자라면 소비자의 평가는 받는다 치더라도 간섭하고 평가를 가할 외부 주주들은 없으니 이 이야기는 논외다.

아무튼 경영자는 매 분기 실적을 주주들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리고 올해 실적은 작년보다 좋아야 하며 내년 실적은 올해보다 좋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경영자는 시장 점유율을 확대 하거나 신규 시장을 발굴하여 지속적으로 사업을 키워야 한다. 그게 힘들다면 비용을 줄이거나 제품 가격을 올려 매해 실적 향상을 꾀해야 한다.

모든 기업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경영자의 KPI는 재무제표 개선에 있다. 재미있는 점은 말단 사원으로 갈수록 다양한 업무 영역의 KPI가 적용되지만 경영자의 경우는 어떤 회사든 KPI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대개 기업이 성장을 하다보면 커다란 자금 수요와 인재수요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비공개 적으로 투자를 받아 외부 자금을 유치하거나, 공개적으로 증권시장에 상장하여 자금을 조달 받아야 하는 단계가 온다. 혹은 외부의 부채를 끌어다 쓰기도 한다.

상장을 하는 중요한 이유 중 또 하나는 창업자가 자신의 지분을 안전하게 exit 시키기 위함에 있다. 그리고 더 높은 가치를 평가 받으며 필요시 언제든 시장에서 지분을 현금화 할 수 있다는 장점도 꼽을 수 있다.

암튼 이런 저런 이유로 주주나 채권자가 제공하는 외부 자금 지원을 피해서 사업을 하는 기업이 시장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상장 법인이라도 주주들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기업내 최고 실력자인 경영자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경영성과가 저조하면 경영자 해임이나 급여 삭감 등의 방법으로 경영자를 문책할 수 있다. 이보다 소극적인 방법으로 보유 지분을 팔아치워 기업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즉,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는 물론이고 거기 속한 기업과 사람 등 구성물들도 모두 '성장'해야 한다. 성장을 가하는 중요한 요소는 '평가'다. 자본이 우리에게 내리는 심판이 평가다. 자본금이든 부채든 남의 돈을 끌어다 쓰면 이 돈들은 이제 경영자를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놓고 보면 기업 경영자도 소유 경영자가 아니라면 자본주의 최종 승자라고 할 수 없어 보인다. 자본주의 최종 승자는 주주들일까?

기업 생태계 최종 평가자 '소비자와 주주'


경영자를 평가한다고 했던 소비자와 주주를 한번 보자.

소비자를 평가할 사람은 없다. 소비자는 오직 평가할 뿐이다. 그러니 자의에 의해 소비 행위를 하는 소비자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평가 스트레스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간혹 불량품을 구입하고서 받는 스트레스는 다른 이야기이니 논외로 하자.

소비자의 스펙트럼은 너무나 다양하다. 우리 모두가 소비자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가난하든 부자든 우리 모두는 소비자다. 그러니 소비자라는 지위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가치는 일단 이 글에서는 없어 보인다.

주주는 어떤가? 주주들은 이익을 얻기 위해 기업에 자본을 대는 사람들이다. 자본을 대는 방법은 부채를 제공하는 방법도 있다. 채권자와 주주의 입장은 법률적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자본을 댄다는 측면에서는 입장이 비슷하다.

다만 채권자는 계약된 이자를 정해진 시기마다 받지만 주주는 기업의 경영 성과에 따라 자산가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고, 지급받는 배당 금액도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회사의 소유자인 주주들은 경영자가 경영을 잘 하는지 특별히 감시하고 이들의 경영성과를 면밀히 평가한다. 이사회 위에 이사 선임이나 해임권한이 있는 주주총회가 있는 것이다. 즉, 기업의 최종 의사 결정 기구는 주주총회다. 말하자면 자본 흐름의 기본 메카니즘은 '평가'에서 오는 셈이다.

CEO타이틀을 달고 있으면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 소유 경영자가 아닌 이상은 바지사장에 불과하고 CEO 개인의 자유도 제한된다. 늘 열심히 일해야 하고 평가 받아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전주(錢主)


주주나 투자가가 최종 승자라고 했지만 엄밀히 들어가면 투자가나 자본가도 여러 부류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투자를 받아 2차 투자를 하는 투자업체 대표자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 고용된 펀드매니저들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자본주의 승자라고는 할 수 없다. 최종 승자는 자기 자본으로 기업이나 자산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결국 투자자들에게 돈을 제공하는 전주가 숨은 승자인 것이다.

개인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자본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일하지 않고도 넉넉하게 즐기며 사는 소수 집단이 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이것은 비단 자본주의만의 문제는 아니다. 왕정 시대에도 풍요롭게 놀고 먹는 집단이 있었다. 봉건시대에도 그랬고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놀고 먹는 소수는 늘 존재했다. 이들은 노동의 존귀함을 대중에게 설파하며 모두가 노동의 가치만 아름다운 것으로 인지 하도록 세뇌시켰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노동하지 않고 풍요롭게 시간과 재화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자본주의는 이전의 시대들 보다 조금 나은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봉건제, 왕정과  같은 시대 배경 하에서는 개천에서 태어난 사람은 놀고 먹는 자리까지 올라가는게 거의 불가능했다. 태어난 혈통이 그 사람의 일생을 낙인 찍어버리는 것이다.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보다는 길이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양극화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지만 조금만 열심히 살고 길을 찾아보면 금방 놀고 먹는 방법을 찾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없지만 노력하고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길이 열린다. 그리고 꼭 거대 자본가가 될 필요도 없다. 샐러리맨 급여 수준의 자유소득만 있어도 그 사람은 노동과 평가에서 평생 해방된다. 많은 사람들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다양한 기회를 접하며 사는 곳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영원할까?




자본주의는 성장을 기반으로 한다고 했는데, 무한정 성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경제 기반은 지구에서 나오는 자원이기 때문이다. 성장은 복리로 이루어지는데 자원을 복리로 캐면 언젠가는 자원이 고갈된다. 그리고 재화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시장포화를 불러온다.

수확체감하는 자본주의 생산/소비체계에 반하는 몇몇 수확체증 적용 분야가 있다. 수확체증 법칙이 가장 잘 적용되는 지식 정보 분야의 자원은 디지털 데이터와 네트워킹 그리고 데이터 베이스이지만 결국 여기도 핵심 자원은 사람이다. 사람은 식량 자원을 소모해야 한다.

다만, 인간이 우주를 개척하거나 슈퍼 푸드를 개발하면 인간은 영원히 성장하고 번영할지도 모른다. 아직 우주를 개척하지 못한 시대이니 무한 성장 기치에서 약간의 다른 가치를 가진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등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놀고 먹는 계층은 존재할 것이고 화폐도 존재할 것이다. 이는 인간 본성이자 인간 사회 구조 본능이라 영원히 바뀌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집단 체제를 이루면서 거친 자연과 싸워 이겨왔고, 공동의 힘으로 거대한 문명을 지탱했다. 집단 체제는 앞으로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집단에서 거래나 노동력의 분산은 필연적이다. 그러면 새로운 이데올로기 하에서도 부의 집중은 다시 시작될 것이고 지불 가치의 유효성 역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체제변화 문제는 자본을 쥐고 있는 사람이 시대 변화에 어떻게 영민하게 대처하냐에 따른 대응 가능한 문제라고 본다.

노동은 나쁜 것이고 가치 없는 것인가?


지배 계층은 대중에게 노동을 하라고 선동하고 포장한다. 노동은 고귀하다고 까지한다. 그러나 인간이 70년 정도 살아가면서 놀고 먹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놀고 먹으면서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해서 사회에 좋은 일을 하고, 또 즐겁게 살아가면 그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물론 모두가 놀고 먹을 수는 없다. 경제적 가치는 노동에서 창출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노동에서 손을 놓으면 맛있는 음식도 즐길수가 없고, 예쁜 옷을 입을수도 없다.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모두가 노동에서 손을 놓을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시스템 체계를 이해하고 사는 사람도 소수이거니와 다수가 이런 체계를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도록 사회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시스템 체계를 계속 업그레이드 해나가기 때문이다.

놀고 먹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지만 자유소득을 얻기 전에는 반드시 노동을 해야한다. 자영업이든 샐러리맨이든 노동을 통해서 창출한 이윤을 모아 이를 투자해서 자유 소득자의 길로 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무조건 부모에게 상속을 받거나, 가진 것도 없이 놀고 먹고 하는 인간의 모습은 나도 반대다. 땀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자유 소득의 가치도 알고 이를 오래간 지킬 수 있는 법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 자유소득을 창출할 만큼 자본을 축적하지도 않았으면서 놀고 먹지는 말아야겠다.

일단 일정 수준이상의 자본이 모이면 이 자본이 자본을 벌어들이기 때문에 돈이 % 기준으로 벌리기 시작한다. 가속도가 붙는다. 등가로 늘어나는 급여와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무일푼에서 자수성가로 억만장자가 되는 사업가나 투자가들의 비밀은 바로 꾸준함이다. 꾸준히 자산을 % 단위로 늘려가는 것이다. 10조원의 거부가 이듬해 10%의 자산 증가를 이루면 11조원의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 일반 샐러리맨이 급여 저축 마인드로 1조를 모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아인슈타인이 복리가 핵보다 무섭다 했다. 누구나 복리 수익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평가 받지 않고 평가만 하는 사람은 무한 자유인, 자유는 자아실현을 도와준다


그리고 자유소득을 누리기 시작하면 자아를 찾아 떠나야 한다. 자유가 주어졌다고 무한정 놀고 먹기만 하면 개나 돼지와 다를바 없다. 숨겨뒀던 자아를 꺼내 실현해 나가고 사회와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소소한 일거리는 뭐가 있는지 찾아다니면서 즐겁게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유인은 이런 일들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평가 받지 않는다. 이것이 큰 이점이다. 스스로 선택할 일을 누구의 평가도 받지 않고 재미있게 할 수 있으며 원하면 언제든지 여행도 떠날 수 있고 사람도 만날 수 있다. 또 학교에 등록해 시간과 돈의 구애를 받지 않고 공부도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돈이 얻어주는 무한자유의 가치는 거기 있다.

왜 계속 놀고 먹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하면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 제도의 틀안에 갇혀서 인간의 재능과 존엄성이 억압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의 개성이 말살된다. 왕권사회는 왕말고 다른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사람을 줄세우고 줄을 선 순서에 따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살아가야 된다.

앞서도 말했지만 모두가 노동을 중단하고 유유자적 할 수는 없다. 자유는 소수 선택된 사람이나 극도로 노력한 사람만이 얻는 선물이다.

내 위에 평가자는 없고 내가 최종 평가자가 돼 무한 자유를 누리며 산다면 비로소 인간 본성의 고귀함에 충실하거나 자아 실현을 위한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영업과 사업


일반적으로 자영업은 사업주 스스로 자기 사업체에 피고용주가 돼 일을 하는 방식으로 사장이 일을 멈추면 사업체도 곧 몰락한다. 사업은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어서 창업주나 소유자가 장기간 자리를 비워도 알아서 굴러간다. 스스로 사람을 채용하고 비지니스를 진행하며 회계 장부를 작성하는 등 일 처리가 자동으로 돌아간다.

아마 많은 자영업자들의 꿈이 스스로 굴러가는 온전한 사업체를 만들고 이를 소유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이 과정이 험난해도 일단 안착만 하면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굉장한 자유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자영업은 급여 생활자보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일의 성취감은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사업의 영속성은 어떤가. 자영업은 수 많은 체계적/비체계적 위험에 노출돼 있다. 자영업을 하더라도 이런 리스크를 재빨리 감지하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사람이면 지속적인 생존을 할 확률이 올라가지만 대부분은 대기업과의 싸움이나 정치경제 환경의 체계적 위험에 노출되는 순간 1년도 못 버티고 무너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영업은 진입 장벽이 낮으며 그 경쟁도 치열하고 수익성이 떨어진다.

이미 일정 궤도에 오른 사업가는 자영업자 보다는 환경이 낫지만 사업가 역시 체계적 위험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사업가는 늘 매력적인 시장을 찾아야 한다. 시장만 잘 찾으면 한동안은 회사가 잘 성장한다. 반면 잘못된 의사 결정이나 시대의 변화로 아무리 큰 회사라고 해도 한순간에 역사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 그리고 큰 회사의 의사 결정자인 만큼 의사결정의 범위도 크고 무게도 무거울 것이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소유 경영자가 아니라면 주주들에게 매해 경영 성과에 대한 평가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 보건데 가장 이상적인 사업가는 기업 지분만 쥐고 있는 주주가 아닌가 생각된다.

사업과 투자


사업을 영위중인 시장에 발생한 악재로 회사 경영이 힘들어져서 사업을 철수하려면 이 철수 업무 또한 만만한게 아니다. 사람을 해고하거나 조직을 재편성 해야하고 신규 사업 발굴이 안 된 상태라면 기업은 큰 위기에 직면하기도 한다. 반면에 사업가를 평가하는 투자자들은 이보다 수월하게 사업 포트폴리오를 변경할 수 있다. 요즘에는 버튼 클릭 한번으로 철강회사 소유주에서 모바일 게임 회사 소유주로 순식간에 업종을 갈아탈수도 있다. 변화하는 시대에 기민하게 대처하기는 이보다 빠른 업무 영역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투자가는 체계적 위험에 대한 대비도 빠르게 할 수 있다. 범국가적 위기가 발생할 징후가 보이거나 특정 자산에 대한 위험 회피가 필요한 경우 자산 배분을 다른 국가로 이전할 수 있으며 주식, 채권, 원자재, 외환 등을 넘나들며 투자 포트폴리오를 변경할 수 있다.

그리고 포트폴리오 배분만 잘 해두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투자 자산의 시세차익은 물론이고 배당, 이자 소득을 재투자해 자산을 더욱 늘리거나 더 큰 자유를 누릴 기회가 생긴다.

이자, 임대료, 배당소득은 불로소득인가?


이자, 임대료, 배당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개인에게 무한대의 자유가 주어진다. 그러나 이도 엄밀히 말하면 불로소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종자돈을 모으기 위해 장기간 고생해야 한다. 또 투자 포트폴리오를 배분하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하고, 거기다 나름대로 투자 스트레스도 있기 때문이다.

시장이 내 의사결정에 대한 부분을 평가하고 그 평가에 따라서 내 자산이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임대업도 마찬가지다 임대 보증금은 가만히 앉아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관리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유소득으로 생활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그나마 자본주의를 살아가면서 투입하는 시간 중 가장 적은 시간을 투자하는 집단이 이 소득을 올리는 집단이고, 모든 의사 결정에 대한 자유와 책임, 그리고 지적 도전에 대한 즉각적인 재미까지... 본인이 스스로 기획하고 감당하기 때문에 성취감도 크다.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 그리고 성공한 샐러리맨


공무원이나 샐러리맨도 결국은 급여라는 종이조각(요즘은 컴퓨터 화면에 찍히는 숫자)과 인생의 소중한 일부인 시간을 교환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자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간혹 큰 회사에서 승승장구하여 임원이 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국은 주주들의 고급 노예일 뿐이다.

고위 공무원은 어떤가? 그들은 자본가들의 자산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정책을 만들거나 법을 집행할 수 있으며 여러가지 힘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소불위처럼 보이는 권력도 유통기한이 있으며 하나의 국가를 벗어나면 힘이 현저히 약해진다.

그에 반해 자본의 힘은 국가를 넘나들며 그 위력을 발휘한다. 심지어 자본이 한 나라의 정치나 경제를 뒤흔들수도 있으며 이는 자손대대로 대를 이어 증식될수도 있다. 자본의 주인이 바보짓만 하지 않고 기민하게 움직이면 그 힘은 영원토록 지켜질 수 있다.

너무 유명해지면 자유를 박탈 당한다


직업을 유지하는데 '인기'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하는 직업들이 있다. 정치인, 연예인 등이 그런 예인데, 이런 경우 직장인보다 더 높은 수준의 평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직장인은 보통 한두사람에게 평가를 당하지만 이 사람들은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천만명에게 평가 당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래서 이들은 자유가 박탈당한다. 혹시 평가자들의 눈 밖에 나면 그 동안 누렸던 인기나 권력, 재력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영속성을 보장 받기도 힘들다.

자본주의 평가 체계에서 살짝 비켜간 직업들


이를테면 사회단체, 대학 등의 기관에서 일하는 직업들은 꼭 자본의 평가만 가지고 뭐라 말하기는 어렵다. 대학교수의 경우에는 학생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입장이지만 자신이 학생들에게 가하는 평가 권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대학 기구 내에서는 절대 권력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도 대학 바깥에서는 돈이 필요하다. 석좌 교수가 아닌 이상 그들도 해고될 수 있으며 일을 꾸준히 해야 생계가 유지된다는 점에서는 이들도 꾸준히 누군가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를 100%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겠다.

마치며..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명예나 올바른 가치관, 그리고 깊은 지성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외에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고귀한 인간성이나 품성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자. 모든 사람은 죽고 죽음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혜택과 풍요를 남기고 갈 수 있는 그런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자.


제 경우 건강이나 가족과 같은 단어를 빼고 가장 중시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사고할 자유, 여행할 자유, 시간을 마음 껏 사용할 자유 모든 자유를 중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안에서 제가 가진 취미나 세상을 위한 일들을 하며 살고 싶습니다. 특히 무언가를 만들거나, 별자리를 관측하는 등의 취미는 돈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일들을 즐기고 자아를 성취하려면 경제적 자유가 필연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유와 더불어 영속적이고 궁극적인 힘이 무엇인가 늘 찾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주겠죠.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영속성과 궁극성은 무엇인지 생각하다 보니 이런 생각들을 글로 풀어 쓰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칫 직업에 있어서 중요한 다른 요소들을 배척한 것 같은 글이 되었습니다만 전혀 그런 의도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여러가지 요소들을 모두 존중합니다. 모든 직업이 자유나 돈만 쫓지는 않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곤궁해도 성취감이 큰 직업도 있고, 직업 내에서 큰 자아성취를 이루는 분들도 많을 것 입니다. 세상 모든 분들의 직업을 존중합니다.

개인적 생각을 에세이로 풀어내는 공간이며, 특정 직업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저와 제 가족, 그리고 제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며 글로 풀어낸 것이니 글을 읽으면서 언짢은 분들이 없으셨기를 바랍니다.

2013년 2월 6일
송종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