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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3일 금요일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

알림 : 이 포스팅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 개요


작가는 할레드 호세이니(Khaled Hosseini)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인입니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파리에서 살던 호세이니 일가가 돌아가기에 아프가니스탄은 이미 평화로운 땅이 아니었습니다. 

공산화 된 조국을 떠난 호세이니 일가는 미국 서부에 터를 잡고 살아갑니다. 알레드 호세이니는 미국에서 차근차근 공부하여 생물학 학사학위를 받고, 의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됩니다. 호세이니는 원래 소설가는 아니었습니다. Cedars-Sinai 병원에서 내과 의사로 근무했습니다. 진료를 마치면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2001년부터 쓰기 시작해서 2003년에 세상에 나온 책이 바로 이 '연을 쫓는 아이'입니다.

할레드 호세이니 <자료 : 유엔난민기구>

호세이니의 첫 소설은 70여 개국에 팔립니다. 총 4,800만 여부가 판매됩니다. 그는 문학계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한 번에 거물이 되었습니다. 후속작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A Thousand Splendid Suns)'도 큰 호평을 받습니다.

'연을 쫓는 아이'가 아프가니스탄 남자들의 이야기라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여자들의 비극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중국의 천안문 시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 미국의 오일쇼크 등 굵직한 글로벌 이슈들 속에 약소국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은 철저히 잊혀졌습니다. 하지만, 할레드 호세이니가 그 비극을 멱살잡고 수면 위로 끌어 올렸습니다. 이만한 애국, 이만한 홍보, 이만한 외교가 따로 있을까 싶습니다.

시대적 배경


소설에 등장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참담할 정도로 극적입니다.

카불이 영국령에서 벗어나고 1923년부터 1973년까지 바라크자이 왕조가 들어섭니다. 군주제긴 했어도 이 시기가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이 시대에 해당합니다.

주인공 아미르는 부유한 아버지를 뒀습니다. 덕분에 수도 카불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동네에 살았습니다. 그 동네에서도 가장 좋은 집이었습니다. 좋은 시대였지만 극명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아미르의 집에는 흙으로 대충 빚어서 지은 하인들의 집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인들은 하자라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미르 가족의 소일거리를 도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산은 하인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 아들인 아미르와 잘 어울려 다녔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비극, 소설에서 아미르 일가와 주변 사람들의 비극은 1973년에 시작됩니다. 자히르 샤 국왕이 해외 순방을 하던 중 무함마드 다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군주정은 폐지되고 공화정 체제로 바뀌지만 사실상 그냥 독재체제였습니다.

개혁정책이라고 실행한 것이 일단의 이슬람 물빼기였습니다. 노선은 '적극적 친 소련 노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함마드 다우드 칸 초대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잔인하게 탄압하였습니다.

1978년,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대통령 관저에서 다우드 칸 대통령과 일가족을 모두 처형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은 극좌 단체였습니다. 초대 대통령은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가 맡았습니다. 국민들에게는 그저 '다우드 칸 대통령이 건강상 문제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라고만 했습니다.

새로 들어 선 정권은 이슬람을 강력하게 탄압했습니다. 종교탄압에 대한 반발로 무자헤딘 게릴라들이 정부군과 군사적 충돌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갑니다.

1979년, 소련은 인접 국가에 대한 안정화를 명목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합니다. 소설에서 바바와 아미르 가족은 망명을 떠납니다. 아미르가 컴컴한 기름탱크 속에 숨 죽이고 있는 장면은 살이 떨리도록 긴장됩니다.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멈춥니다. 그리고 침공한 소련군을 상대로 싸웁니다. 지리한 충돌끝에 1988년에 소련은 군대 철수를 결정합니다.

이후에도 무자헤딘과 새로 들어선 나지불라 정부군의 충돌은 계속 됐습니다. 1992년 무자헤딘이 카불을 점령하며 승리를 선언합니다. 하지만 무자헤딘 안에도 다양한 파벌이 있었습니다. 무자헤딘이 논공행상과 각종 이해관계로 산산조각 납니다. 이 틈을 타고 탈레반이 등장합니다.

1970년대 서구적인 복장의 카불 여성들
지금 저러고 다니면 즉결처형 대상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탈레반은 극단주의 종교단체입니다. 1996년 이들은 카불을 점령하였습니다.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오랜 전쟁과 폭력 그리고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탈레반이 이 혼란을 끝내 주리라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탈레반을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더 크고 끔찍한 고통이 다가올 것을 모른채..

등장인물의 간략한 캐릭터


아미르


파슈툰족. 바바의 아들. 바바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한다. 카불의 가장 좋은 집에 사는 도련님. 그는 생각이 많지만 겁도 많다. 때로는 야비한 면도 있다. 하지만 연민도 많다. 복잡한 인물이다.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하산이 강간당하는 것을 보고도 모른체 한다. 하산은 강간을 당하면서도 도련님을 위한 연을 지켜낸다. 아미르는 그 연을 들고 바바에게 인정받는다. 아미르는 이것을 평생의 마음의 짐으로 안고 살아간다.

바바


아미르의 아버지. 꽤 성공한 사업가이자 자선사업가. 카펫 수출사업, 2개의 약국, 하나의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사업은 잘 됐다. 주변 사람들을 아낌없이 도왔으며 고아원을 자비로 지어서 운영했다. 그는 서구 자유주의에 가까운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능력있고 냉철한 사람이었다. 아들 아미르에게도 그랬다. 그는 아미르가 강인한 남자이길 바랐다. 성에 차지 않았는지 차갑게만 대했다. 되레, 하인의 아들이었던 하산을 남자로서 더 인정하는 면도 있었다. 바바는 자존심도 강했다. 소련군의 총구 앞에서도 할 말은 했다. 미국에서도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게 주는 식료품 지원 카드를 집어 던지고 주유소에서 고생하면서 일을 하는 성격이었다.

아세프


공군조종사의 아들. 아세프의 아버지는 바바와 친구였다. 아세프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문제아였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꽤나 칭찬받는 아이였다. 흉기를 들고 다니면서 친구들에게 폭력을 가했다. 그런 그도 바바는 무서워 했다. 바바 덕분에 아미르는 아세프의 직접적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세프는 군주제 붕괴를 환영했다. 어려서부터 야망이 대단히 컸다. 그는 히틀러를 추종했다.

라힘 한


바바의 동업자. 바바의 집에서 함께 자주 시간을 보냈다. 아미르에게는 정서적으로 아버지인 바바보다 더 가까운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제2의 아버지, 아니 어쩌면 어머니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라힘 한은 바바의 글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아미르와 하산이 갖고 있는 출생의 비밀도 바바와 함께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하산


알리의 아들. 아미르의 친구. 충직한 하인이다. 의리와 용기가 있는 친구다. 주인님을 위해서는 천 번이라도 희생하겠다는 우직한 캐릭터다. 연날리기 대회에 재능을 갖고 있다.

알리


하산의 아버지이자 아미르 가족의 하인이다. 한편으로 아미르가 가족처럼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 역시 우직한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미르가 꾸민 모종의 나쁜짓으로 인해서 알리는 하산을 데리고 평생을 함께했던 아미르의 집을 떠나게 된다.

소라야


아미르가 미국 망명생활을 하면서 만난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끼리 모여서 시장을 열었는데 거기서 만났다. 이슬람 문화권 특징상 남녀가 자유롭게 말을 걸고 연애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둘은 첫눈에 반하고 눈빛으로 대화를 나눈다. 나중에는 소라야 어머니의 배려로 자주 만날 수 있게 된다. 소라야는 한 번의 파혼 경험이 있다. 아미르는 이를 모두 눈 감아준다. 소라야 역시 마음씨가 따뜻한 여성이다.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 힘들어 했지만 소랍을 내 아들처럼 받아 들인다.

소랍


하산의 아들이다. 하산이 탈레반에게 처형 당하고 소랍은 탈레반에게 끌려간다. 탈레반에게 감금과 성폭행을 당하는 등 모진 생활을 하며 지내다 아미르에게 구출된다. 새총을 잘 쏘았다. 아버지 하싼의 새총은 중요한 순간에 아미르를 구했다. 그러나 소랍의 새총은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 새총 한 발 덕분에 소랍은 미국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소랍은 새총 쏘는 실력만 출중한 것이 아니라 용기도 금빛으로 빛났다. 그것은 아버지 하산의 유전자를 물려 받았기 때문이리라. 신분제가 없는 미국에서 꿈을 펼치며 잘 살았길 바란다.

연이 의미하는 것


연 날리기는 아프가니스탄의 전통놀이다. 연의 씨줄과 날줄은 나라의 운명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운명도 격자로 동조되는 모습을 나타내는 듯 하다.

연을 날리는 모습은 자히르 샤 국왕 시절에 한번 묘사된다. 그리고 소설 말미에 미국 집회 장소에서 연을 날린다. 초반부 연은 평화의 상징이었고, 후반부의 연은 자국의 평화를 희망하는 작가의 염원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군은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다.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탈레반의 수중에 들어갔다.

극 중 연은 아미르가 아버지 바바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아주 중요한 표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산의 능력과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아미르의 인생은 그 연과 함께 쭉 가슴속에 묻어 둔 고통,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소련과 탈레반, 그리고 미국


왕정이 붕괴되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한다. 그리고 다양한 세력이 내전을 일으킨다. 나중에는 미국이 개입해서 잠시 평화가 찾아 오는 듯 싶었다. 하지만 미군이 철수하면서 다시 탈레반 소굴이 된다.

천년만년 같은 땅. 하지만 지배하는 세력은 계속 변한다. 그 과정에서 선 인지 악 인지도 모를 폭력이 계속된다. 사람들은 우리편일 것 같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머잖아 그들이 총칼로 우리를 억압한다. 도대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한국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내 망상이기는 하다. 내가 항상 머릿속에 갖고 있는 생각을 소설이 적나라하게 풀어냈다. 반짝이고 활기찬 도시 서울이 폐허가 된 모습. 거리를 떠도는 부랑인들과 거지들. 끊겨버린 전기와 상수도. 망가진 건물들에서 흩날리는 시멘트 먼지들. 디젤 냄새와 썩는 냄새들.

카불은 서울에 초가집이 가득하던 시절에도 꽤 발전한 도시였다. 사람들의 옷 차림은 서구적이었고, 경제도 활기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불은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폭력과 살육의 도시가 되었다. 세상과 단절됐다. 여자들은 이제 부르카를 착용하고 다녀야 하며 혼자서 거리를 다닐 수도 없다.

악담이 아니라 우리나라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다. 우리나라도 내전이 잠시 멈춰있는 나라가 아니던가. 그리고 세계의 분쟁을 몰고 다니는 미국, 중국, 러시아의 힘이 충돌하는 곳이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 나라를 자손들에게 잘 물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평화와 풍요의 생활은 얼마든지 어제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겪지 못한 꿈 같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아슬아슬한 우리나라가 그나마 버티는 건 강력한 경제력과 한미동맹 덕분이다. '강력한'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어떻게 보면 연약한 유리 같을지도 모른다. 방심하는 사이 그것은 깨질 수 있다. 며칠 전에 썼던 '사소한 한뼘 차지하기'게임이 한반도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므로.

누구에게나 말 못할 비밀은 있다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에 200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그것은 말로 표출한 것이다. 아마 대답을 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은닉하는 것 까지 포함하면 인간은 거짓말을 생산하는 기계라고 봐도 될 정도다. 물론 나도 인간이기에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소설 속 인물들도 거짓말을 한다. 극 중 아미르는 바바에게 1등 연을 자기가 쟁취한 것처럼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하산을 도둑으로 몰아 집에서 쫓겨나게 만든다. 알리와 하산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아미르의 거짓말에 눈을 감아준다.

반대로 바바는 아미르에게 죽을 때 까지 하산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함구한다. 거짓말도 도둑질이라고 가르치던 바바는 아미르에게 가장 큰 도둑질을 하고 세상을 떠난다. 아미르는 바바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아미르는 평생의 짐을 덜기 위해 탈레반 소굴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하산의 아들 소랍을 구해낸다. 그 과정에서 치아가 함몰된다. 갈비뼈는 몇개나 부러진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수도 있었다. 아세프에게 죽도록 폭행을 당하면서 아미르는 웃는다. 어쩌면 평생의 짐을 그렇게 덜어 낸다는 생각에 홀가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랍을 양자로 입양한다. 하산에게 지은 죄를 그렇게 씻어낸다.

누구나 거짓말을 하는 만큼, 누구에게나 말 못할 비밀은 있다. 다만, 세상의 수 많은 거짓말과 비밀이 발각되지 않을 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수 많은 비밀들과 거짓말이 발각된다면 세상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투명해 지기 보다는 폐허가 될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상대의 거짓말을 알았을 때도 어느 정도는 눈을 감고 포용하는 태도도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나에게 큰 피해를 끼치는 것만 아니라면. 그것이 관계를 위한 기술이다.

가령 어떤 모임이 있다고 하자. 그 모임에 나온 사람들이 해왔던 거짓말, 그리고 숨겨 둔 치부들을 몽땅 테이블 위로 꺼낸다고 치자. 그 모임은 폭파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해야 살아갈 수 있다. 관계를 위해 불가피한 거짓말은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많은 사람들의 거짓말과 치부를 알고 있지만 내 가슴 속에 모두 묻었다. 나 역시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는 내 치부를 가슴에 묻어 뒀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죄의 시간은 필요하리라.

실재하나 꿈이고, 꿈인 듯 실재하는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상류층의 삶을 살던 바바는 미국에서 극빈층의 삶을 살아간다. 겨우 일자리를 하나 구했지만 주유소 주유원이었다. 바바의 손은 갈수록 갈라졌다. 얼굴에는 주름이 늘었다. 허리는 굽어가고 피부는 검어졌다. 총명하고 여유있던 바바는 화를 버럭 잘 내는 그런 괴팍한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 얼마나 황망한가.

부유한 삶을 누리게 만들어 준 물질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살아 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그 관계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바바가 본국에 있을 때 도와 주었던 사람들은 바바의 죽음에 모두 슬퍼했다. 그것이 그가 남긴 유산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하는 부분이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탈무드의 이야기가 있다.

'해적들이 우리가 평생 모은 재산을 가져가도 상관없다. 일단 우리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 지혜와 지식만 남아 있으면 된다. 그것은 그 누구도 훔쳐갈 수가 없다.'
 
한편, 아미르는 미국에 머문지 20년 정도 되었다. 작가로도 성공했다. 가정도 이뤘다. 풍요로운 캘리포니아를 떠나 희망이 없는 고향땅을 밟는다. 고향땅은 앞서 서술한 대로 폐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들은 이렇게 다르다. 굳이 미국과 아프가니스탄만큼 멀어질 필요도 없다. 아마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사는 우리네 인생도 그럴 것이다.

사소한 판단과 선택으로 개인의 삶은 극명하게 갈린다. 어쩌면 신의나 의리 같은 것들이 그렇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아미르는 미국 시민권, 소라야, 소랍과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고 나머지는 모두 잃었다. 라힌 함과 하산은 의리와 신의를 지키고 나머지를 모두 잃었다. 절대 선, 절대 악이 없듯이 이 부분도 너무나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그래서 소설이 더 비극적이다.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어쩌면 사는 것 자체가 꿈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서 즐거음과 행복을 찾고, 옆에 함께 하는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며 매 순간을 살면, 그 뿐인지도.

사진 : 송종식

작가 덕분에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에 대해서 세계에 널리 알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현재 아프간 난민이 미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이처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질디 모진 인생을 살다 간 하산이 자꾸만 눈에 밟힙니다. 충직하고, 올곧으며, 의리와 신념이 있는 친구입니다. 게다가 머리도 좋고 성실합니다. 하산이 아프가니스탄이 아니라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여운이 많이 남는 책이었습니다.

2023년 2월 3일
송종식 드림


2021년 9월 23일 목요일

오징어게임, 돈과 인간 그리고 이념에 대한 잡생각 (Squid Game)

* 본 포스팅에는 결말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의 신작인 오징어게임을 보면서 부분적으로 세상살이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아주 높은 사고 수준을 요구하는 드라마는 아닙니다. 재미에 있어서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다소 뻔했습니다. 그래도 뻔한 내용에 뻔한 소리를 질러대는 드라마를 보면서 나름대로 인간들의 삶에 대해서 다시금 반추하는 기회로 삼아 보았습니다.

권력은 총과 돈, 격리에서 나온다


게임 참가자는 다수입니다. 게임 운영자들은 소수입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게임 운영자들이 다수의 참가자를 지배합니다. 그들을 굴복하게 만든 힘은 1차적으로는 총입니다. 총칼 앞에서 대부분은 굴복합니다. 그 다음 통치 수단은 바로 돈입니다. 참가자들 내면 깊숙한 곳의 탐욕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노예의 길로 걸어가게 만듭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역사는 늘 다수의 대중을 소수의 지배자가 총칼과 돈으로 지배해 왔음을 게임에서도 보여줍니다. 금권과 군사권을 쥔자가 인간사회의 권력을 쥡니다.

중간에 몇번의 사소한 봉기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총칼 앞에서 곧 진압됩니다. 만약, 대규모 봉기가 성공했더라도 그 다음은 고립에 대한 이슈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서울대 상우는 본인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이룬것인가?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인 증권맨 상우는 게임에서도 상위 0.43% 안에 들어갑니다. 참가자 465명 중 2등까지는 살아 남아서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상우는 매사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그는 게임 후반부로 갈수록 자기가 여기까지 살아 남아서 올라온 것은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행운은 전혀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이루었다고 강한 확신에 빠져 있는 상우를 통해서, 황동혁 감독은 실제 세상은 노력만으로 돌아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노력만을 강조하는 세태를 꼬집으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울대 상우는 자신을 친형처럼 믿고 따르던 알리를 속이고 배신하기도 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참가자를 밀어 추락사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식으로 게임의 최종 승리자 직전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서울대 상우에게는 그런것도 노력이면 노력이라고 믿는 게 아닐지 안타까웠습니다.

실제 극 막판에 기훈은 상우에게 말합니다.

"너처럼 그렇게 잘난 새끼가 왜 여기서 머리 나쁘고 능력도 없는 나하고 이러고 있냐"고.

바깥 세상에서 상우는 횡령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곡된 노력과 과도한 탐욕의 결과였습니다.

주인공 기훈은 본인의 노력만으로 465억 원을 얻은 것인가?


서울대 상우와 달리 기훈은 자신의 생존이 자기 능력 덕분이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다만, 게임 운영자들과 주변 사람들이 기훈을 부추기는 발언들을 합니다. 기훈이 파이널리스트까지 올라간 것은 누구의 덕도 아닌 기훈 본인의 노력 덕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기훈은 첫번째 게임에서 조기 탈락할 운명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외국인 노동자 알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첫번째 게임을 통과합니다. 이런식으로 기훈은 매순간 주변의 도움으로 '운 좋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운영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게임의 결과만을 중시해서 그 결과에 대한 몫은 오롯이 기훈의 몫이며 모두 기훈의 노력만으로 얻은 것이라고 치켜세웁니다.

노력 만능주의 사회, 결과주의 사회에 대한 감독님의 비판적인 의견이 느껴졌습니다.

작은 게임마저도 복잡계다


우리가 실제 살아가는 세상에 비하면 오징어게임에 등장하는 게임들은 조건도 심플하고, 결과도 심플합니다. 세상의 극히 일부분을 엄청나게 정말 엄청나게 축소시켜 놓은 작디작은 모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고작 465명이 참가하는, 룰조차 너무 간단한 이 게임의 결과는 복잡계의 산물로 탄생합니다.

이를테면, 기훈과 상우가 최종 우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론상 465명이 만들 수 있는 21만 5,000가지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을 얻었다는 이야기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게임에 적용되는 여러가지 확률까지 더하면 이들이 살아 남아서 상금을 거머 쥘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확률에 도전하는 지능 또는 성향의 문제가 있으니 참가자들은 바깥에서도 늘 돈 때문에 걱정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도박성향은 인생패망의 지름길입니다.

어쨌든 강화유리와 일반유리를 구분하는 게임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기훈이 이 게임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앞선 플레이어들이 일으킨 여러가지 효과 덕분입니다. 그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얽히고 설킨 관계들, 그리고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의 페르소나들. 그런 것들이 짬뽕처럼 조화되어 기훈이 해당 게임을 통과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 변수들 중 작은 것 하나만 틀어졌어도 기훈은 해당 게임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작은 게임조차도 매우 복잡계입니다. 하물며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훨씬 더 복잡계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매사 노력하고 옳은 구조와 틀을 짜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개인의 모든 성공을 오롯이 자기 자신의 공덕으로만 돌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반대로 모든 실패 역시 내탓으로만 돌리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겸손과 용기, 그리고 자존감을 잘 믹스하여 현명하게 살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요.

가난한 자와 부자의 공통점에 대한 1번 할아버지의 뼈 있는 이야기


1번 할아버지는 극 후반부에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가난한 자와 돈이 넘쳐서 감당이 안되는 부자의 공통점은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가난한 사람은 삶이 지옥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생존만을 위해서 하루하루 살아 나가야 하니 삶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올라가고 싶은 이상이 높을수록 더욱 그렇겠죠.

부자들 역시 다른 쪽으로 삶이 무료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극중에 나오는 VIP들 정도 되는 재력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원하는 집, 차, 심지어 회사나 미녀, 맛있는 음식..? 그 무엇도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한 희망이 삶의 동력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VIP들은 그런 간절함이 전혀 없습니다. 원하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삶이 무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징어게임 드라마에서 이 부자들은 자신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대량살상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실제 현실 세계에서 인성이 망가진 일부 부자들은 대부분 주색에 빠지거나 주색 조차 지루하게 느껴지면 마약과 같은 향정신성 의약품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확실한 삶의 나침반이 없이 단지 명문대 입학만이 목적인 수험생은 목표로 하는 명문대에 입학하는 순간 목적이 달성되며 삶의 방향타를 잃어 버립니다.

강력한 기대감을 모멘텀으로 품은 주식은 그 모멘텀이 실현되면 되레 주가가 폭락합니다.

오로지 인생의 목표가 돈인 사람은 실제 돈을 손에 쥐고 나면 위와 같이 망가지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회복탄력성과 평균회귀 능력이 아주 좋습니다. 큰 사고를 겪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불행은 잊혀 집니다. 큰 행운을 얻어도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기쁨과 슬픔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극중 VIP들과 같이 반사회적 행동들을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에는 돈미새들이 많습니다. 돈미새에 해당하는 분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부분들이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큰 부를 얻고도 매일같이 하하하 웃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자 지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 동안 번돈을 사회에 돌려주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청년 사업가들에게 투자와 멘토링을 하고, 대중들을 상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사회의 많은 부분에 알게 모르게 기부를 하면서 유의미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부자가 되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힌트를 얻는 것도 좋아보입니다.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VIP들처럼 극단의 쾌락을 좇다가 살인기계가 되거나, 현실속에서 주색과 마약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돈을 좇는 것도 좋지만, 삶의 본질에 대해서도 늘 사색하고 통찰하는 시간들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자가 아니지만 제 경우에 추천드리는 것은 매일매일의 소일거리들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블로그에 글을 매일 쓰는 것, 책을 써 보는 것, 집 앞의 정원과 화단을 애정을 갖고 꾸며 보는 것, 코딩을 배워서 앱을 만들어 보는 것, 악기를 배우는 것 등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소소하지만 연속적인 행복의 요소들은 정말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네 삶이 어린 아이들 놀이나 쇼 같은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집니다. 아수라장이 되고 여기저기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배경음악은 해맑기만 합니다. 거대한 수용소이자 살상의 장소는 아이들 장난감 같은 것들이 널부러져 있고, 색감도 러블리 하기만 합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모두의 삶을 아이들의 장난 수준으로 바라 볼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그런데, 오징어게임의 감독님이 연출하신 분위기와 매우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회사에 출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차가 매우 막혔습니다.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는 것 모든게 꾸며진 연극같다"

'소중한 내 삶을 왜 이렇게 정체된 도로 위에서 보내야 하는지. 저 수 많은 사람들은 또 왜 그래야 하는지. 정말로 먹고 사는 문제가 이렇게 잠을 줄여가면서 치열하게 살아야만 해결되는 문제인지. 우리는 누구의 통제로, 무엇의 지시로 이렇게 레밍떼처럼 아침 저녁으로 삶을 버려 가며 이동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출퇴근을 안하면 안되는지. 진학, 취업, 출퇴근.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이 모든 틀을 깨고 나가면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닌지?'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외의로 먹고 살기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이 거대한 연극같은 세상에 그렇게 발버둥치고 매달리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게 연극이고 쇼라고 생각해보면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뭔가 명확해지는 아이디어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어나가고, 피가 난무하는 상황과 달리 해맑고 밝기만 한 오징어게임의 연출을 보면서 묘하게 그때 했던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시스템이 대중을 조종하고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인간의 본성은 단지 선과 악으로만 구분짓기는 어렵습니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 먹는다고 해서 그것을 악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고도화 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본능을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의사결정의 펀더멘털은 결국에는 본성에서 나옵니다.

오징어게임과 같이 극단적 환경에서는 이런 태도가 가슴 속 바깥으로 꺼내져서 적나라하게 표출됩니다.

단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밀린 월급만을 받기를 원했던 알리는 본의 아니게 사장을 장애인으로 만듭니다. 탈북녀 새벽은 탈북 브로커에게 속아서 모은 돈을 계속해서 사기를 당해 날려버립니다. 이런식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오징어게임에 들어오면서 말 그대로 생존본능을 발현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게임을 하나씩 진행하면서 점점 괴물로 변하갑니다.

다만, 사람들이 놓친 부분도 있습니다. 

모두가 협동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면 가급적 사망자를 줄이고 많은 사람들이 승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스템이 구상한대로 서로 죽이고 싸우면서 혼자만 살겠다고 사투를 벌입니다. 시스템의 계획에 말려든 것입니다. 

더욱 극단적인 카드도 있었습니다. 총칼이 무섭겠지만 게임 운영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판을 뒤집어 버릴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분열하고 반목하며 서로 믿지 못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통제 당하는 것 처럼요.

뭐, 민주국가들도 마찬가지기는 합니다. 시스템이 의도적인 메시지 하나를 대중에게 던지면 대중들을 그것을 덥썩 물고 서로 찢어 죽일 듯 싸우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분할하고 지배하는 것, 그리고 분할하고 통치하는 것'. 이것이 시스템과 지도자들이 대중들을 다루는(?) 기본 전략입니다. 인간은 서로 믿지 못하고, 반목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이것을 깨고 유일하게 협력의 열쇠를 쥐고 움직인 사람이 극중에서는 기훈이었습니다.

판을 뒤집는 게 쉬운 것도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극 중에서 룰브레이커가 몇 명 나옵니다. 의사가 한명 나오는데 게임 참가자이기도 했습니다. 게임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장기를 해체해서 게임 운영자들의 장기매매를 도와줍니다. 그러면서 다음 게임이 무엇인지 미리 내부자 정보를 획득해서 생존을 이어가죠. 편법을 쓰는 룰브레이커입니다. 그러나 그는 중도 탈락합니다.

경찰 준호는 애초에 게임 참가자도, 운영자도 아닌 스파이로 섬에 잠입합니다. 그 역시 룰브레이킹을 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운영자들을 하나씩 죽이지만 결국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채 프론트맨에 의해서 사망합니다.

총칼 앞에서 판을 뒤집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님을 새삼 느꼈습니다.

시스템은 당신의 성공을 두고 보지 않는다


유리판독 게임에서 전직 유리 기술자였던 참가자는 해당 게임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아주 쉽게 게임을 진행합니다. 그러나 시스템은 이를 두고 보지 않습니다. 즉시 해당 참가자가 찾아낸 비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예전에 인타임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가난한 노동자였던 저스틴 팀버레이커가 무명의 부자로부터 막대한 자산을 증여받자, 시스템은 즉시 그를 체포해서 자산(시간)을 도로 빼앗으려고 합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흙수저인 여러분이 크게 성공한다면, 수 많은 기득권이 당신이 이룬 성취를 빼앗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대처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늘 상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시스템은 흙수저가 어떤 치트키를 찾아서 크게 성공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보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일단 어떤 꼬투리라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기득권을 위한 시스템의 수호자인 국세청과 경검찰은 치트키를 발견해서 성공한 흙수저를 밟아 없애기 위해서 늘 출동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게임 규칙은 제 멋대로 변하고 일관성도 없었습니다. 현실에서도 그렇습니다. 최고 권력층에게 법은 자기보호 수단입니다. 자기 입맛대로 바꾸고 해석할 수 있으며 그다지 지키지 않아도 돈, 권력, 인맥으로 처벌을 피해갑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과 서민들에게는 엄격한 통제의 수단입니다. 시스템이 만든 사소한 규칙이라도 어기게 되면 칼같이 처벌합니다. 

또한, 누구하나가 성공하면 을끼리 꼬투리를 잡아서 시스템에게 신고하고 처벌을 종용하는 기현상도 생깁니다. 시스템은 즉시 성공한 을을 심판하기 위해 출동합니다.

퇴사할 것인가? 계속 다닐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라마에서 현실 세계를 회사라 치면, 오징어게임장은 퇴사한 사람들의 모임 같았습니다.

"회사는 정글이지만 밖은 지옥이다."

정말로 그것이 잘 묘사된 드라마였습니다. 경제적 자유, 시간적 자유, 파이어족이라는 단어에 세뇌된 분들은 한번쯤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유능하다고 알려졌던 몇몇 투자자들 조차도 지옥에서 견디지 못하고 유료리딩방 사업을 합니다. 지옥에서는 생존이 일단의 지상과제가 됩니다.

지나친 권선징악 (유비의 촉한은 망했지만, 기훈은 승리했다)


'사람들이 반목하지 않고 협력하여 승리를 이끌어 낸다'. 이상적입니다. 실제 세상도 그렇게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감독님의 그런 바람이 드라마에 녹여진 것 같습니다.

흡사,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과 오징어게임 감독님이 바라는 이상향이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관중 역시 지나친 현실주의자이자 실리주의자인 조조를 희대의 악당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후퇴하는 길에 노인과 여자 등 백성들까지 일일이 챙긴 유비는 한껏 치켜 세웠습니다.

오징어게임 감독님을 나관중이라고 본다면 주인공인 기훈은 유비 캐릭터에 가까웠습니다. 남을 이기려고 하지 않고 사람들을 도왔을 뿐인데, 게임의 승리자가 됩니다. 물론 기훈도 중간에 할아버지에게 한번 사기를 치기는 합니다만, 기훈은 전반적으로 살상도 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들을 도와 가면서 끝까지 함께 가기를 바라는 캐릭터입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디 그렇던가요?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유비형 캐릭터보다 조조형 캐릭터들이 더 성공합니다. 또한, 유비라고 어디 인의만 따질까요? 유비도 상당히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흉악한 권모술수를 가진 정치가였습니다.

드라마 초반부터 느껴지는 권선징악의 향기에서 저는 게임의 최종승자가 기훈이 될 것이라는 것을 사실 초반부터 알아버렸습니다. 권선징악을 기반으로 한 뻔한 전개는 김이 새는 부분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엎어버리자? 따뜻한 자본주의 체제를 이어가자?


저는 드라마 초반부에서 이 게임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축소한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이 게임을 기획한 것은 음모론자들이 좋아하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초권력, 초세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실제 VIP들이 서양인(G2국가인 중국인 1인 포함)인 것을 확인하고 더욱 그런 마음을 갖고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또한, '서양의 초국제세력이 만든 판에서 우리 동양인들이 죽어 나가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은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갖고 노는 설정은 아닐까?'라는 의구심도 마음 한켠에 가지고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너무 사악하고 나쁜 서구식 자본주의 혹은 초강대국들을 비판하기 위한 내용일까 싶었습니다.

나중에야 한국인인 1번 할아버지도 게임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왜 재미로 동족을 살상하며 쾌락을 즐긴 것인가?

1번 할아버지는 국가, 민족, 인권 같은 것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 이른바 글로벌 기업가로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호화병상에 누운 모습과 창 밖을 통해서 보이는 길거리 노숙자의 모습이 의미심장했죠. 그리고 그 글로벌 기업가는 세계의 다른 글로벌 자본과 연합하여 사람들을 주무른다는 설정으로도 보였습니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한 사람의 성공에는 수 많은 사람의 희생이 따른다."
"수 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 한 사람이 부를 독식한다."
"시작을 평등하게 하더라도 결과는 평등하지 못하다."

자본주의체제와 반자본주의 체제 모두에 대한 감독님의 회의주의가 느껴졌습니다.

다만, 따뜻한 세상을 만들자는 감독님의 메시지에는 공감을 했지만 부자를 지나치게 악한 모습으로 설정한 부분에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VIP들은 대체로 살이 쪘는데, 게임 참가자들은 모두 비쩍 마른 사람이 많은 설정도 그렇습니다.

또, 드라마에서는 부자, 남자, 서울대, 여의도 금융권, 대한민국, 중소기업 사장 등은 강자로 또는 악인으로 묘사됩니다. 탈북민, 이슬람계 외국인 노동자, 여자, 고졸 공장 노동자 등은 선하거나 의리가 있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묘하게 PC주의로 공격받을 수 있는 지점들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실제로는 악마같은 부자들보다 따뜻한 부자들이 더 많을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사람 목숨조차 자신들의 유희를 위한 장난감 정도로 생각한다는 설정도 섬짓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이 체제와 판을 뒤집어 버려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돈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당연히 안되겠죠. 그러나 드라마는 지나치게 돈과 금융,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주의와 악마화가 느껴져서 큰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아마 시즌2가 나온다면 시즌2에서는 기훈이 게임의 판을 뒤집는데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예측도 해보았습니다. VIP들을 사로잡은 뒤 게임판의 말로 만들어서 자신과 사람들이 당했던 것을 똑같이 되갚아 주면서 복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다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말로 세상이 바뀌는 걸까 싶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세상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