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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2일 월요일

지금도 누군가는 영웅을 꿈꾸고, 난세는 현재진행형이다

자료 : SBS

행적이 묘연하던 빌라왕의 근황이 보도되었다. 그 빌라왕은 사망했다. 빌라 1,139채를 무자본으로 매입하여 언론으로부터 '빌라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전세금으로 투자하고, 다시 그것을 레버리지 삼아 다음 주택을 매입하는 식의 연쇄갭투자로 빌라를 매입하였다.

이것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레버리지 사용행태이다. 이 사람이 빌라와 오피스텔 한 채당 1,000만 원씩 남기고 모두 매각하는데 성공했다고 가정하면 순자산 100억 원이 넘는 자산가가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주택경기가 냉각되어 집값이 떨어지면 이 사람의 인생은 정확히 그 반대가 된다. 집값이 하락하고 중간에 현금흐름이 막혔다. 국세도 미납되기 시작했다. 계약이 끝난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했다. 한동안 잠적했다. 그 결과로 이 사람은 죽음이라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피해자에게 살해를 당한 것인지, 신변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40대의 젊고 건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둘 중 하나로 사망하였으리라.

한편, 경찰은 804명의 전세금 갭투자 사기꾼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해 피소를 당했다. 집이든 뭐든 자산 가격은 언제든지 하락할 수 있다. 이들은 그것을 망각했다. 무자본으로 무리하게 갭투자하여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 오늘 검거된 사람 중에서는 자기 돈을 한푼도 들이지 않고 3,493채의 빌라를 매입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 사람도 한채당 1,000만 원만 남기고 되팔기 한 사이클을 성공했다고 가정하면 순자산 300억 원대의 자산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결말도 교도소행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출소하면 이 사람이 가진 3,493채의 주택은 모두 경매를 통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 있을것이다. 인생지사 새옹지마이다.

자료 : 삼국지 전략판

조조가 원소 진영의 오소를 불태우러 갔던 도박은 대성공했다. 하지만 적벽대전 도박은 80만 대군을 거의 잃을 정도로 실패했다.

일개 백수였던 유방은 진시황의 명령으로 장정들을 이끌고 수도 함양으로 가던 중 진시황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주하는 도박을 선택한다. 

"어차피 진나라의 법이 엄격하니 이렇게 함양에 가봐야 개죽음 밖에 더 당하겠냐. 거기서 죽나 여기서 죽나 똑같다. 관리들을 죽이고 우리는 각자의 갈길로 흩어지자!" 

이 작은 도박을 시발점으로 유방은 훗날 한나라를 건국하는 초대 황제가 된다.

인생을 건 도박의 결과가 몇 번만 성공하면 황제가 탄생한다.

반면에, 이릉대전에서 주력군을 붙에 타 죽게 만든 유비처럼 실패한 도박의 결과는 처참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이 시대에도 우리는 수 많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장사로, 또 어떤 사람은 투자로, 또 어떤 사람은 사업으로, 그리고 정치분야에서, 과학분야에서, 체육분야에서..

앞선 갭투자자들도 원대한 꿈을 안고 도박을 하였으리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그것이 잘 되면 소황제가 되어 멋진 인생을 살았을것이다. 하지만 실패하였을 때는 죽음과 교도소 뿐이다!

수 많은 타인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저들을 옹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지금같은 난세가 아닌 듯 난세인 시대. 기득권의 패권이 공고한 시대에, 왕후장상의 씨를 물려 받지 못한 사내들이 원대한 꿈을 품고 위로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면 강남 부자집 자제들을 이길 수 있는가? 정석으로만 간다고 중산층 이상의 풍요로운 사람들의 삶을 추월하고 꺾어낼 수 있는가? 

빈민들의 출세 전략은 어찌보면 단순하다. 살찐 상류층의 허를 찔러 치고 올라갈 수 있는 변칙술을 잘 쓰던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걸어 승부를 보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그런 숱한 시도를 하다가 피흘리고 쓰러져간 모든 사람들의 최후에 숙연한 마음이 든다.

한편, 그런 술법으로 빠르게 기득권을 무너뜨리며 치고 올라간 사람들도 있다. 김범수, 권혁빈, 서정진, 고 김정주 회장님 같은 분들이다.

지금도 수 많은 사내들은 영웅이 되는 것을 꿈꾸고, 지금보다 잘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난세는 지금도 조용히 진행중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얻기 위해 나는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가? 현재 속도로 가면 안락하기는 하다만, 목표로 한 고지에 도달할 수는 있겠는가? 자문자답을 해본다.

2022년 12월 12일
송종식


2022년 8월 18일 목요일

은둔현자 호소(胡昭)


호소(胡昭)는 후한 말에 태어나 삼국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다. 162년에 예주 영천군에서 태어나 250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기준으로도 그렇지만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장수했다. 그가 태어난 예주 영천군은 현재 허난성 일대다. 조조가 수도로 삼았던 허창성이 영천군에 속했다. 영천군은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순욱, 곽가, 서서 등 많은 인물이 영천군 출신이다.

호소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식견이 풍부하고 인품이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정치와 세태의 흐름을 꿰고 있었다. 그런 인재를 세상이 가만히 둘리 없었다. 그래서 충분히 관직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재야에 묻혀서 농사를 지으며 경서를 읽고 자유롭게 살았다. 책을 읽고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개인 영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또한 바람처럼 살길 바랐다. 자유를 향한 그의 갈망은 천하의 조조도 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위나라를 집어 삼킨 사마의의 스승이자 친구로도 유명하다.

호소는 영천 사람이지만 전란을 피해 기주로 피신한 적이 있다. 이때 기주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원소의 눈에 띄었다. 원소가 친히 호소를 찾아 관직에 임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호소는 진흙똥밭에서 스트레스 받으며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소의 스카웃 제의를 거절하고 다시 영천으로 달아났다.

조조보다 사람보는 눈이 떨어졌던 원소의 눈에도 황금으로 보였던 호소를 조조가 못 볼리 없었다. 영천에서 두문분출 하던 호소를 조조가 건드려댔다. 호소는 조조의 부름에 몇번의 거절을 했다. 당시 시대상이 그랬다. 재야에는 많은 실력자와 현자들이 있었다. 물론 가짜 현자와 가짜 실력자도 그만큼 많았다. 어쨌든 저마다 관직에 진출하여 자신의 뜻을 펼칠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주인이 자신들을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주인이 찾아오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곧장 응하지는 않았다. 몇번 튕겨주는 것이 당시 관례였다. 그것은 몸값을 높이기 위한 아주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조조는 호소 역시도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 그런 얕은 수를 쓰는 사람 정도로 보았다. 조조의 고집을 꺾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결국에 조조가 사람을 보내 호소를 마당으로 끌어냈다. 호소는 별 수 없이 조조를 한번 만났다.

조조는 권세가였다. 호소는 명성은 높았지만 권세가는 아니었다. 조조는 누구의 목숨이라도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둘 사이의 힘의 균형을 논할 필요도 없었다. 힘만 놓고 보면 둘 사이의 힘의 불균형은 명백했다. 그렇지만 호소는 기개와 절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조조가 그 자리에서 죽인다고 했어도 죽이라고 했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주 앉은 조조와 호소의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흘렸다. 팽팽한 기싸움과 힘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호소가 조조에게 절절히 말했다.

"저는 한낱 시골촌부일 뿐입니다. 군사로 쓰일 재목도 아니고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도 전혀 없습니다."

조조는 변덕이 심한자였다. 물론 그 변덕은 철저히 무엇이 이익이 더 큰지에 따른 계산의 결과였다. 두통이 심했던 조조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갔다. '죽일까? 돌려 보낼까?'

조조는 호소를 돌려 보내는 쪽으로 선택했다. 호소를 돌려 보내면서 조조는 탄식했다. '사람마다 뜻이 다르니 힘을 이용해서 굴복 시키지는 않겠다.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지만 아쉽다.'는 것을 내비쳤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조조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된다. 인재욕심이 많았던 조조가 호소를 얼마나 아까워 했을지는 눈에 선하다.

어쨌든 조조는 호소의 선택을 존중했다. 호소는 당대 최고의 권세가를 상대로 자유를 향한 기개를 지켜냈다.

조조와 원소 <자료 : KOEI>

호소는 세상과 더 멀리 떨어졌다. 육혼산 산중으로 깊숙히 들어가 기거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글을 쓰고, 파란 하늘을 보며 유유자적했다. 

호소는 기재로서의 재능과 인품 덕분에 명망이 높았지만, 그는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가 쓴 글은 사대부들이 따라 쓰기에 바빴다. 그가 쓰다 버린 죽간도 사람들이 주워서 비싼값에 팔았는데 곧 잘 팔렸다.

당시는 난세였다. 군벌들의 싸움 뿐 아니라 곳곳에서 반란이나 도적질도 잦았다. 마초의 반란으로 백성들 수 천이 호소가 사는 곳 근처의 산으로 몰려 들었다. 그곳에 질서가 있을리 만무했다. 사람들은 서로 못할 짓을 하였는데 호소가 이들을 잘 타일러서 질서를 바로 잡았다. 

낙양성 육혼현에 사는 백성 중 손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손랑은 징발과 부역에 큰 부담을 느꼈다. 물론 이런 부담은 그곳 모든 장정들이 느꼈다. 먼 곳까지 가는 것이 부담이었던 이들은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순식간에 현읍들을 격파하고 현 주부를 살해하고 일대 지역을 손에 넣는다. 

다만, 손랑은 호소를 마음 속 깊히 존경했다. 그래서 호소가 사는 부락 만큼은 공격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래서 난리 통에도 호소가 사는 부락은 평화로웠다. 그것을 미리 알아챈 장고는 그 부락으로 숨어 들었다.

호소의 인품과 명망이 사람들로 부터 어느 정도로 존경을 받았는지는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더 와닿을 것이다. 호소가 사는 곳 사방 300리에는 범죄가 일절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도적떼도 호소를 존경해서 호소가 사는 지역에서는 나쁜짓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시대 에스원

호소가 육혼산에 기거할 때 사마의는 아직 관직에 있지는 않았다. 사마의는 언젠가는 관직에 나아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관직도 하지 않는 명사와 친분을 쌓고 싶다는 호기심도 있었다. 그래서 사마의는 육혼산으로 들어가 호소와 교류하며 배움을 청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마의는 꽤 순수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호소와 경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의 잘못된 점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 할 정도였으니 이미 높은 수준의 식견을 갖춘 상태였다고 봐도 되겠다.

둘은 꽤 죽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사마의는 호소를 존경했고 그에게서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호소에게 배움을 청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 주생이라는 사람이었다.

원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한번은 주생이 사마의를 죽이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호소는 이것을 미리 알아챘다. 사마의가 호소에게 오던 날. 주생은 사마의를 죽이려고 사람들을 모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호소는 둘이 만나기 전에 주생이 오던 길목을 막아섰다. 그리고 제자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산천초목도 슬퍼서 함께 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도 주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승 호소의 거듭된 호소에 주생도 결국은 고집을 꺾었다.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질 뻔 했던 사마의를 스승 호소가 구해냈다.

사마의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렇지만 눈치가 빠른 사마의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는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사마의는 이 사건 이후로 많은 것을 깨우쳤다.

'재능이 있다고 그것을 함부로 뽐내면 안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얕보고 깔 봐서도 안된다. 숙이자. 그리고 또 숙이자.' 

당장 이런 태도가 몸에 체득된 상태는 아니었겠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사마의 캐릭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어떤 태도가 발현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마의는 훗날 위나라에서 정치를 할 때도 이런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며 조조의 의심을 피했다.

사마의는 아들의 이름을 '사'와 '소'로 짓는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사마의가 호소를 존경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으로 갈수록 사마의는 점점 호소와는 아주 먼 방향으로 흑화되고 만다.

말년에 호소는 4번째 이사를 하는데 장소는 의양이었다. 그곳에서도 변함없이 산기황문시랑 두서 같은 명사들과 함께 토론하며 지냈다. 두서 역시 인품이 훌륭하기로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유의, 종요, 조엄, 하정, 장제 등 수 많은 명사와 권세가들이 호소를 천거하라고 추천했다. 서기 250년에 명사들의 추천을 위시해 호소를 궁으로 불러 들이라는 명이 있었지만 호소는 당해 세상을 떠난다.

현대에도 호소와 같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2022년 8월 18일
송종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