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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5일 목요일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통찰 vs. 상식)

사진 : 유튜브 '인문학 TV 고경'님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 일반적인 견문,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상식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정의다. 이 정도면 깔끔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통찰(인사이트)도 상식과 크게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앞선 정의 중 단 하나에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한다. '사회 구성원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상식과 통찰을 가르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통찰을 현재시점과 미래시점으로 나누어 보고 싶다. 

현재 시점의 통찰은 '사물과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 능력이다. 미래 시점의 통찰은 남들보다 눈과 귀가 밝아서 좀 더 미래를 잘 내다 볼 줄 아는 능력이다.

많은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이야기는 현재 시점에서의 '상식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통찰은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인사이트가 담긴 이야기 중 어떤 것은 많은 비난, 조롱, 멸시, 무시를 동원하기도 한다. 특히, 이면을 정확하게 꿰뚫어 봐야만 이해를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구성원 대부분으로부터 비난, 조롱, 멸시, 무시를 당하는 주장이 먼 훗날 언젠가 현실이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주장한 사람을 우리는 '인사이트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번은 맞다. 어떤 난무하는 주장 중 몇개는 실제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통찰이 지속해서 시현된다면 그 사람을 우리는 '통찰력 있는 사람', '현자'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뛰어난 전략가, 인사이트 있는 의사 결정자에게 왜 조롱을 던지는가. 대부분의 범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다. 우리 세상은 수면 아래에서 돌아가는 엔진,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이 실로 많다. 그리고 그 힘도 어마어마하다.

그것은 왜 그런가? 간단한 인간관계만 참고해 봐도 이 부분을 이해하기 쉽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한다. 굳이 우리 사생활 모든 것을 남에게 꺼내놓지 않는다. 그것이 모여 세상의 거대한 '이면'이 된다.

카메라에 노출된 정치인의 언행 보다, 카메라 뒤편 술자리에서 오가는 정치인들의 거래가 실제 세상을 움직인다. 언론 보도자료로 나타난 기업의 말과 글보다, 회장과 의사 결정자 측근에서 오가는 적나라한 이야기가 그 회사 힘의 실체이며 진실이다.

세상은 평화롭게 돌아가는 듯 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남들에게 말 못할 고통과 근심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보는 남녀 상당수는 불륜 커플이다(불륜자 통계 636만 명, 2015년 서울신문). 겉으로 쉬쉬하고 '나는 깨끗한 척' 비난하는 껍데기는 그냥 눈에 보이는 단편일 뿐이다. 되레 그런 사람들이 더 호박씨를 까고 뒤로는 애인 하나쯤 두고 있는 것이 '이면'이다.

우리가 투자나 사업으로 성공을 하려면 반드시 이면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이는 결국 통찰력 보유의 여부로 귀결된다.

만약 인사이트가 없는 사람이라면 지극히 상식적이면 된다. 다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야 하므로 그것이 이면에서 돌아가는 힘보다 확실하고 강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상식적인 의사 결정의 뒤에는 반드시 엉덩이의 힘이 뒤따라야 한다. 

상식은 이미 남들도 다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세에 반영이 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시간의 힘을 빌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에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극히 상식적인 힘으로만 투자를 하려면 엉덩이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범인들은 10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얘가 그려 놓은 설계도의 극히 일부조차 이해 못함. 무엇보다 자기는 세상에 기여하는 것도 일절 없으면서 남이 하는 일에 죄다 토달고 조롱하는 인간들이 잘 사는 건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함. 나보다 압도적으로 잘 사는 사람을 상대로 뒷다리 잡을 시간에 '마 내 앞가림이나 잘 하자'. 몇 글자 쓰고, 몇 마디 하고 나면 현타는 안 올까?
<자료 : 유튜버 디피>

얼마전에 유튜버 디피가 신사임당 채널을 20억 원 현금을 주고 인수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신사임당은 고점에 매도를 잘 했다.", "신사임당 채널은 조회수를 보니까 망했다.", "디피는 고점에 매수해서 실수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바로 그런 관점이 이면을 볼 줄 모르는 범인들의 관점인 것이다. 이면을 파고 들어가면 전혀 다른 과정과 결과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유튜버 디피의 천재적인 전략과 신사임당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알게 되고 깜짝 놀랄 것이다.

제갈량, 사마의, 장량이 왜 역사적인 천재 전략가인가. 당시 사람들은 이해도 하지 못할 전략들을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 결과들은 모두 어땠나?

잠시 이야기가 겉돌았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경계하자. 이면을 보는 눈을 기르자. 거기서 실력이 벌어진다. 만일, 보이는 대로만 믿는 사람이고, 이면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지극히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엉덩이를 붙이고 인내하는 힘을 기르자. 둘 중 하나만 잘 하면 먹고 사는 것은 충분하다.

2022년 12월 15일
송종식


2022년 8월 18일 목요일

은둔현자 호소(胡昭)


호소(胡昭)는 후한 말에 태어나 삼국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다. 162년에 예주 영천군에서 태어나 250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기준으로도 그렇지만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장수했다. 그가 태어난 예주 영천군은 현재 허난성 일대다. 조조가 수도로 삼았던 허창성이 영천군에 속했다. 영천군은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순욱, 곽가, 서서 등 많은 인물이 영천군 출신이다.

호소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식견이 풍부하고 인품이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정치와 세태의 흐름을 꿰고 있었다. 그런 인재를 세상이 가만히 둘리 없었다. 그래서 충분히 관직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재야에 묻혀서 농사를 지으며 경서를 읽고 자유롭게 살았다. 책을 읽고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개인 영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또한 바람처럼 살길 바랐다. 자유를 향한 그의 갈망은 천하의 조조도 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위나라를 집어 삼킨 사마의의 스승이자 친구로도 유명하다.

호소는 영천 사람이지만 전란을 피해 기주로 피신한 적이 있다. 이때 기주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원소의 눈에 띄었다. 원소가 친히 호소를 찾아 관직에 임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호소는 진흙똥밭에서 스트레스 받으며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소의 스카웃 제의를 거절하고 다시 영천으로 달아났다.

조조보다 사람보는 눈이 떨어졌던 원소의 눈에도 황금으로 보였던 호소를 조조가 못 볼리 없었다. 영천에서 두문분출 하던 호소를 조조가 건드려댔다. 호소는 조조의 부름에 몇번의 거절을 했다. 당시 시대상이 그랬다. 재야에는 많은 실력자와 현자들이 있었다. 물론 가짜 현자와 가짜 실력자도 그만큼 많았다. 어쨌든 저마다 관직에 진출하여 자신의 뜻을 펼칠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주인이 자신들을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주인이 찾아오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곧장 응하지는 않았다. 몇번 튕겨주는 것이 당시 관례였다. 그것은 몸값을 높이기 위한 아주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조조는 호소 역시도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 그런 얕은 수를 쓰는 사람 정도로 보았다. 조조의 고집을 꺾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결국에 조조가 사람을 보내 호소를 마당으로 끌어냈다. 호소는 별 수 없이 조조를 한번 만났다.

조조는 권세가였다. 호소는 명성은 높았지만 권세가는 아니었다. 조조는 누구의 목숨이라도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둘 사이의 힘의 균형을 논할 필요도 없었다. 힘만 놓고 보면 둘 사이의 힘의 불균형은 명백했다. 그렇지만 호소는 기개와 절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조조가 그 자리에서 죽인다고 했어도 죽이라고 했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주 앉은 조조와 호소의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흘렸다. 팽팽한 기싸움과 힘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호소가 조조에게 절절히 말했다.

"저는 한낱 시골촌부일 뿐입니다. 군사로 쓰일 재목도 아니고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도 전혀 없습니다."

조조는 변덕이 심한자였다. 물론 그 변덕은 철저히 무엇이 이익이 더 큰지에 따른 계산의 결과였다. 두통이 심했던 조조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갔다. '죽일까? 돌려 보낼까?'

조조는 호소를 돌려 보내는 쪽으로 선택했다. 호소를 돌려 보내면서 조조는 탄식했다. '사람마다 뜻이 다르니 힘을 이용해서 굴복 시키지는 않겠다.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지만 아쉽다.'는 것을 내비쳤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조조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된다. 인재욕심이 많았던 조조가 호소를 얼마나 아까워 했을지는 눈에 선하다.

어쨌든 조조는 호소의 선택을 존중했다. 호소는 당대 최고의 권세가를 상대로 자유를 향한 기개를 지켜냈다.

조조와 원소 <자료 : KOEI>

호소는 세상과 더 멀리 떨어졌다. 육혼산 산중으로 깊숙히 들어가 기거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글을 쓰고, 파란 하늘을 보며 유유자적했다. 

호소는 기재로서의 재능과 인품 덕분에 명망이 높았지만, 그는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가 쓴 글은 사대부들이 따라 쓰기에 바빴다. 그가 쓰다 버린 죽간도 사람들이 주워서 비싼값에 팔았는데 곧 잘 팔렸다.

당시는 난세였다. 군벌들의 싸움 뿐 아니라 곳곳에서 반란이나 도적질도 잦았다. 마초의 반란으로 백성들 수 천이 호소가 사는 곳 근처의 산으로 몰려 들었다. 그곳에 질서가 있을리 만무했다. 사람들은 서로 못할 짓을 하였는데 호소가 이들을 잘 타일러서 질서를 바로 잡았다. 

낙양성 육혼현에 사는 백성 중 손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손랑은 징발과 부역에 큰 부담을 느꼈다. 물론 이런 부담은 그곳 모든 장정들이 느꼈다. 먼 곳까지 가는 것이 부담이었던 이들은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순식간에 현읍들을 격파하고 현 주부를 살해하고 일대 지역을 손에 넣는다. 

다만, 손랑은 호소를 마음 속 깊히 존경했다. 그래서 호소가 사는 부락 만큼은 공격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래서 난리 통에도 호소가 사는 부락은 평화로웠다. 그것을 미리 알아챈 장고는 그 부락으로 숨어 들었다.

호소의 인품과 명망이 사람들로 부터 어느 정도로 존경을 받았는지는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더 와닿을 것이다. 호소가 사는 곳 사방 300리에는 범죄가 일절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도적떼도 호소를 존경해서 호소가 사는 지역에서는 나쁜짓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시대 에스원

호소가 육혼산에 기거할 때 사마의는 아직 관직에 있지는 않았다. 사마의는 언젠가는 관직에 나아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관직도 하지 않는 명사와 친분을 쌓고 싶다는 호기심도 있었다. 그래서 사마의는 육혼산으로 들어가 호소와 교류하며 배움을 청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마의는 꽤 순수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호소와 경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의 잘못된 점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 할 정도였으니 이미 높은 수준의 식견을 갖춘 상태였다고 봐도 되겠다.

둘은 꽤 죽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사마의는 호소를 존경했고 그에게서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호소에게 배움을 청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 주생이라는 사람이었다.

원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한번은 주생이 사마의를 죽이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호소는 이것을 미리 알아챘다. 사마의가 호소에게 오던 날. 주생은 사마의를 죽이려고 사람들을 모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호소는 둘이 만나기 전에 주생이 오던 길목을 막아섰다. 그리고 제자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산천초목도 슬퍼서 함께 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도 주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승 호소의 거듭된 호소에 주생도 결국은 고집을 꺾었다.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질 뻔 했던 사마의를 스승 호소가 구해냈다.

사마의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렇지만 눈치가 빠른 사마의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는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사마의는 이 사건 이후로 많은 것을 깨우쳤다.

'재능이 있다고 그것을 함부로 뽐내면 안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얕보고 깔 봐서도 안된다. 숙이자. 그리고 또 숙이자.' 

당장 이런 태도가 몸에 체득된 상태는 아니었겠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사마의 캐릭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어떤 태도가 발현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마의는 훗날 위나라에서 정치를 할 때도 이런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며 조조의 의심을 피했다.

사마의는 아들의 이름을 '사'와 '소'로 짓는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사마의가 호소를 존경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으로 갈수록 사마의는 점점 호소와는 아주 먼 방향으로 흑화되고 만다.

말년에 호소는 4번째 이사를 하는데 장소는 의양이었다. 그곳에서도 변함없이 산기황문시랑 두서 같은 명사들과 함께 토론하며 지냈다. 두서 역시 인품이 훌륭하기로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유의, 종요, 조엄, 하정, 장제 등 수 많은 명사와 권세가들이 호소를 천거하라고 추천했다. 서기 250년에 명사들의 추천을 위시해 호소를 궁으로 불러 들이라는 명이 있었지만 호소는 당해 세상을 떠난다.

현대에도 호소와 같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2022년 8월 18일
송종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