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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8일 목요일

은둔현자 호소(胡昭)


호소(胡昭)는 후한 말에 태어나 삼국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다. 162년에 예주 영천군에서 태어나 250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기준으로도 그렇지만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장수했다. 그가 태어난 예주 영천군은 현재 허난성 일대다. 조조가 수도로 삼았던 허창성이 영천군에 속했다. 영천군은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순욱, 곽가, 서서 등 많은 인물이 영천군 출신이다.

호소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식견이 풍부하고 인품이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정치와 세태의 흐름을 꿰고 있었다. 그런 인재를 세상이 가만히 둘리 없었다. 그래서 충분히 관직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재야에 묻혀서 농사를 지으며 경서를 읽고 자유롭게 살았다. 책을 읽고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개인 영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또한 바람처럼 살길 바랐다. 자유를 향한 그의 갈망은 천하의 조조도 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위나라를 집어 삼킨 사마의의 스승이자 친구로도 유명하다.

호소는 영천 사람이지만 전란을 피해 기주로 피신한 적이 있다. 이때 기주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원소의 눈에 띄었다. 원소가 친히 호소를 찾아 관직에 임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호소는 진흙똥밭에서 스트레스 받으며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소의 스카웃 제의를 거절하고 다시 영천으로 달아났다.

조조보다 사람보는 눈이 떨어졌던 원소의 눈에도 황금으로 보였던 호소를 조조가 못 볼리 없었다. 영천에서 두문분출 하던 호소를 조조가 건드려댔다. 호소는 조조의 부름에 몇번의 거절을 했다. 당시 시대상이 그랬다. 재야에는 많은 실력자와 현자들이 있었다. 물론 가짜 현자와 가짜 실력자도 그만큼 많았다. 어쨌든 저마다 관직에 진출하여 자신의 뜻을 펼칠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주인이 자신들을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주인이 찾아오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곧장 응하지는 않았다. 몇번 튕겨주는 것이 당시 관례였다. 그것은 몸값을 높이기 위한 아주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조조는 호소 역시도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 그런 얕은 수를 쓰는 사람 정도로 보았다. 조조의 고집을 꺾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결국에 조조가 사람을 보내 호소를 마당으로 끌어냈다. 호소는 별 수 없이 조조를 한번 만났다.

조조는 권세가였다. 호소는 명성은 높았지만 권세가는 아니었다. 조조는 누구의 목숨이라도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둘 사이의 힘의 균형을 논할 필요도 없었다. 힘만 놓고 보면 둘 사이의 힘의 불균형은 명백했다. 그렇지만 호소는 기개와 절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조조가 그 자리에서 죽인다고 했어도 죽이라고 했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주 앉은 조조와 호소의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흘렸다. 팽팽한 기싸움과 힘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호소가 조조에게 절절히 말했다.

"저는 한낱 시골촌부일 뿐입니다. 군사로 쓰일 재목도 아니고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도 전혀 없습니다."

조조는 변덕이 심한자였다. 물론 그 변덕은 철저히 무엇이 이익이 더 큰지에 따른 계산의 결과였다. 두통이 심했던 조조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갔다. '죽일까? 돌려 보낼까?'

조조는 호소를 돌려 보내는 쪽으로 선택했다. 호소를 돌려 보내면서 조조는 탄식했다. '사람마다 뜻이 다르니 힘을 이용해서 굴복 시키지는 않겠다.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지만 아쉽다.'는 것을 내비쳤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조조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된다. 인재욕심이 많았던 조조가 호소를 얼마나 아까워 했을지는 눈에 선하다.

어쨌든 조조는 호소의 선택을 존중했다. 호소는 당대 최고의 권세가를 상대로 자유를 향한 기개를 지켜냈다.

조조와 원소 <자료 : KOEI>

호소는 세상과 더 멀리 떨어졌다. 육혼산 산중으로 깊숙히 들어가 기거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글을 쓰고, 파란 하늘을 보며 유유자적했다. 

호소는 기재로서의 재능과 인품 덕분에 명망이 높았지만, 그는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가 쓴 글은 사대부들이 따라 쓰기에 바빴다. 그가 쓰다 버린 죽간도 사람들이 주워서 비싼값에 팔았는데 곧 잘 팔렸다.

당시는 난세였다. 군벌들의 싸움 뿐 아니라 곳곳에서 반란이나 도적질도 잦았다. 마초의 반란으로 백성들 수 천이 호소가 사는 곳 근처의 산으로 몰려 들었다. 그곳에 질서가 있을리 만무했다. 사람들은 서로 못할 짓을 하였는데 호소가 이들을 잘 타일러서 질서를 바로 잡았다. 

낙양성 육혼현에 사는 백성 중 손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손랑은 징발과 부역에 큰 부담을 느꼈다. 물론 이런 부담은 그곳 모든 장정들이 느꼈다. 먼 곳까지 가는 것이 부담이었던 이들은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순식간에 현읍들을 격파하고 현 주부를 살해하고 일대 지역을 손에 넣는다. 

다만, 손랑은 호소를 마음 속 깊히 존경했다. 그래서 호소가 사는 부락 만큼은 공격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래서 난리 통에도 호소가 사는 부락은 평화로웠다. 그것을 미리 알아챈 장고는 그 부락으로 숨어 들었다.

호소의 인품과 명망이 사람들로 부터 어느 정도로 존경을 받았는지는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더 와닿을 것이다. 호소가 사는 곳 사방 300리에는 범죄가 일절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도적떼도 호소를 존경해서 호소가 사는 지역에서는 나쁜짓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시대 에스원

호소가 육혼산에 기거할 때 사마의는 아직 관직에 있지는 않았다. 사마의는 언젠가는 관직에 나아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관직도 하지 않는 명사와 친분을 쌓고 싶다는 호기심도 있었다. 그래서 사마의는 육혼산으로 들어가 호소와 교류하며 배움을 청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마의는 꽤 순수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호소와 경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의 잘못된 점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 할 정도였으니 이미 높은 수준의 식견을 갖춘 상태였다고 봐도 되겠다.

둘은 꽤 죽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사마의는 호소를 존경했고 그에게서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호소에게 배움을 청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 주생이라는 사람이었다.

원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한번은 주생이 사마의를 죽이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호소는 이것을 미리 알아챘다. 사마의가 호소에게 오던 날. 주생은 사마의를 죽이려고 사람들을 모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호소는 둘이 만나기 전에 주생이 오던 길목을 막아섰다. 그리고 제자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산천초목도 슬퍼서 함께 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도 주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승 호소의 거듭된 호소에 주생도 결국은 고집을 꺾었다.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질 뻔 했던 사마의를 스승 호소가 구해냈다.

사마의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렇지만 눈치가 빠른 사마의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는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사마의는 이 사건 이후로 많은 것을 깨우쳤다.

'재능이 있다고 그것을 함부로 뽐내면 안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얕보고 깔 봐서도 안된다. 숙이자. 그리고 또 숙이자.' 

당장 이런 태도가 몸에 체득된 상태는 아니었겠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사마의 캐릭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어떤 태도가 발현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마의는 훗날 위나라에서 정치를 할 때도 이런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며 조조의 의심을 피했다.

사마의는 아들의 이름을 '사'와 '소'로 짓는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사마의가 호소를 존경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으로 갈수록 사마의는 점점 호소와는 아주 먼 방향으로 흑화되고 만다.

말년에 호소는 4번째 이사를 하는데 장소는 의양이었다. 그곳에서도 변함없이 산기황문시랑 두서 같은 명사들과 함께 토론하며 지냈다. 두서 역시 인품이 훌륭하기로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유의, 종요, 조엄, 하정, 장제 등 수 많은 명사와 권세가들이 호소를 천거하라고 추천했다. 서기 250년에 명사들의 추천을 위시해 호소를 궁으로 불러 들이라는 명이 있었지만 호소는 당해 세상을 떠난다.

현대에도 호소와 같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2022년 8월 18일
송종식


2022년 7월 20일 수요일

소하에게 배우는 안목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본래 불량배 출신이다. 그 자신에게 이렇다 할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유방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게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다. 어쩌면 가장 갖기 어려운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유방은 리더의 자질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음흉한 속내도 지닌 사람이었다.

한삼걸 이야기


불량배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여 황제가 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세 사람이 있다. 그 세 사람을 '한 삼걸'이라 부른다.

첫째, 지략과 지혜의 장량이다. 장량은 '장막 안에 앉아서 천리를 내다보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그 정도로 판이 돌아가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책을 내는데 능한 사람이었다. 후세대가 뛰어난 후배에게 주는 가장 큰 칭찬 중 하나가 '그대는 나의 장자방이오'라는 말이다. 그 장자방이 이 장량이다.

둘째, 한신은 동양 역사에 남을 전쟁의 신이다. 젊어서는 동네 불량배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다니는 수모를 당하는 등 궁핍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원래 항우 진영에 있었지만 항우의 눈에 띄지 못했다. 유방 진영에서 눈썰미가 좋은 소하의 눈에 띄어 유방군 대장군에 발탁된다. 한신은 그야말로 전쟁의 신으로서 가는 곳 마다 승리한다. 위왕을 사로잡은 것을 시작으로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나라까지 줄줄이 6개국을 모두 멸망시킨다.

한때 한신이 움직이는 군사력이 유방을 넘어 서기도 했다. 이때 한신의 책사 괴철이 유방을 배신하고 천하를 3개로 쪼개 천하삼분지계를 하자고 계책을 낸다. 이때 한신이 괴철의 이야기를 따랐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전쟁 수행 능력에 비해서 한 없이 떨어지는 정치력을 가졌던 그는 결국 괴철의 이야기를 따르지 않는다. 훗날 한신은 유방의 본 부인인 여치에 의해 처형된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사실은 훨씬 이전 춘추전국시대 때 월나라 군사 범려에게서 나온 말

셋째, 소하는 행정의 신이었다. 유방 진영의 살림을 도맡에서 했다. 소하는 최전방에서 유방군이 전투를 잘 치를 수 있도록 후방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의 행정력을 보여주었다. 도대체 어디서 쥐어 짜서 나오는지 모를 군량과 세금이 마르지 않고 유방군에게 흘러 들었다. 그 역할을 했던 결정적인 인물이 소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하는 유방 진영의 살림에 구멍나지 않도록 부지런히 일했다. 소하는 위대한 행정가였지만 장량에 뒤쳐지지 않을 처세와 지혜도 갖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 유방에게 많은 조언을 했다. 열심히 일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아서 훗날 개국공신들이 토사구팽 당하고 처형 당할 때 소하만은 살아 남는다.

함양궁에 입성한 소하가 챙긴 '이것'


유방은 항우와의 함양 입성 경쟁에서 승리한다. 항우보다 빨리 함양에 들어 온 유방은 진나라로부터 항복을 받는다. 이로써 진나라는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진시황을 비롯해서 진나라는 큰 건축물에 집착했다. 함양궁과 아방궁을 건설하는 데는 장정 70만 명이 동원되었다. 공사는 수십년을 지속했다. 아방궁과 함양궁은 다리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강성했던 진나라의 심장부에 들어선 유방과 그의 부하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식한 불량배 출신들 다웠다. 그들은 궁에 있는 보석과 보물, 그리고 여자를 챙기기에 바빴다.

그러나 소하는 달랐다.

소하는 모두가 보석과 보물 따위에 눈이 뒤집혀 있을 때, 조용히 서적들과 행정문서, 각종 행정자료들을 챙겼다. 그리고 그것을 잘 숨겨둔다. 당시의 책이나 행정자료는 죽간으로 되어 있어서 무게도 많이 나갔을 것이다. 모두가 금은보화에 눈이 멀어 있을 때, 소하는 아무런 빛도 내지 않는 죽간을 챙겼다. 그의 눈에는 그것이 당장의 금은보화 몇 푼보다 귀하다는 것이 보였을 것이다.

함양궁에 입성해 행정자료들을 챙기고 있는 소하
자료 : 중국 안후이TV, KBS

이때 소하가 챙겨둔 이 행정자료들은 훗날 유방에게 큰 도움이 된다. 한나라를 건국하면서 국가를 장악하고, 세금을 걷고, 군사시설을 이용하는 등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것들은 금덩이 몇 개와 비교할 수 없는 값어치를 지닌 것이다. 소하의 통찰력과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잠깐 장량의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유방 역시 무뢰배 출신이 아니던가. 그 역시 금은보화와 궁내 미인들을 보고 눈이 뒤집힌다. 이때, 장량이 유방에게 간언을 했다.

"궁에 있는 보물들에는 손도 대지 마십시오. 고작 이거 손대려고 이 고생을 하셨습니까? 장차 적을 물리치고 천하를 얻고자 한다면 검소한 모습을 보이셔야 합니다."

유방은 이 조언을 듣고는 궁에 있는 귀한 것들은 손대지 않았고, 궁에도 머물지 않고 궁 밖에 머물렀다.

항우는 유방보다 늦게 함양에 도착한다. 이미 유방이 진나라로 부터 항복을 받아 냈다는 소식도 들어 알고 있었다. 유방은 검소한 태도로 백성들의 지지도를 끌어 올리지만, 항우는 20만의 진나라 병사를 모두 죽여버리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다. 게다가 함양성을 모두 불태워 없애 버리기 까지 했다. 이로써 항우는 당대 사람들에게 커다란 악명을 쌓게 된다. 이때부터 백성들의 마음이 누구의 편으로 기울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논공행상을 하면서 난리가 났던 일


유방이 천하를 통일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상벌을 주는 일 아닌가. 특히 개국공신들 중에서 누구에게 어떤 상을 줘야 하는지는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논공행상은 어려운 문제였다. 저마다 자기의 공이 크다고 싸워대는 통에 논공행상은 물론이고 국정 운영에도 큰 차질이 있었다. 논공행상은 몇년이나 걸렸다. 개중에는 칼을 들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마침내 유방은 소하를 차후에 봉했다. 소하를 천하통일 최고의 공신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그랬더니 전투에 참가했던 많은 공신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난동을 부렸다. 사람들은 전쟁의 선봉에서 늘 고생을 했던 조참을 소하보다 더 인정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신들은 자신들이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동안 소하는 후방에서 편안하게 지낸 것이 전부인데, 어째서 소하에게 최고 봉직을 주느냐며 큰 불만을 터트렸다.

이때 유방이 군신들의 소란을 잠재우고 그들 앞에 서서 말했다.

"여러분은 짐승을 잡아오는 사냥개의 역할을 했을 뿐이네. 하지만 사냥꾼은 사냥개에게 먹이의 소재를 알려주고 사냥개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보살피지 않는가? 역할로 따지자면 그대들은 사냥개에 불과하고, 소하는 사냥꾼이라 할 수 있다. 사냥개는 사냥이 끝나면 어떻게 하는가? 잡아 먹는다네."

저마다 자기가 공신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이내 숙연해졌다. 이에 유방이 한마디를 더 붙인다.

"그리고 천하통일이라는 먼 여정을 함께 하는 동안 여러분들은 고작 몸뚱아리 하나만 나를 따르지 않았는가? 소하는 모든 일족이 목숨을 걸고 나와 함께 했다네."

이때, 유방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악천추가 발언한다.

"폐하가 전쟁에서 질 때 마다 소하는 병력, 식량, 자원을 모아 폐하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는 소하와 같은 사람들의 능력으로 세워진 것이지 조참과 같은 사람을 얻음으로써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소하는 폐하가 효산에서 여러번 패 하는 동안에도 관중지방을 굳건히 지켜 낸 공로도 있습니다. 반면에, 조참과 같은 사람이 100명이 있다고 한들 한 왕실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나라를 운영함에 있어서도 소하의 역할이 더욱 중요합니다."

유방은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다시 한번 천명했다. 소하는 공신들 중 유일하게 칼을 차고 유방을 알현할 수 있었고, 유방 앞에서 격의 없이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보면 유방도 불량배 출신이기는 하나, 단순히 감정에 치우치거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는 혼군은 아니었던 듯 하다.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은 물론,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능력은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2022년 7월 20일
송종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