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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3일 목요일

정주영 회장님이 MZ친구들에게 날리는 일침 (feat. MBC영웅시대)

Attitude is everything!

자수성가한 사업가, 투자자이거나 혹은 그걸 꿈꾸는 남자들 치고 정주영 회장님이나 이병철 회장님을 워너비로 삼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 드라마는 그 두 영웅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다. 방영 당시 실방으로 부지런히 봤다. 종영 이후에도 여운이 많이 남아 생각이 날 때 마다 찾아보고 용기와 힘을 얻었던 드라마다. 며칠 전 곤조투자가님이 어떤 채팅방에서 이야기를 꺼내서 놀라웠다. 나도 마침 몇달 전 부터 영웅시대를 정주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MBC에서 유튜브에 올려 놓은 조각 영상들 중에서 명언이 담긴 영상들을 공유해 보고 싶어서 이 포스팅을 작성한다. 비록 드라마지만 현실 고증이 비교적 잘 되었고, 사업이나 투자로 성공을 꿈꾸는 남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한 에너지가 담긴 내용들이다.


이 빈대 에피소드는 아주 유명한 일화다. 정주영이 18살 때 인천 부두에서 막일을 하며 겪은 실화다. 이때는 이미 돈을 벌겠다고 네 번째로 가출을 하였던 시기다.

막일 현장은 숙식이 가능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위생상태가 아주 나빴다. 특히 빈대 때문에 잠을 청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사업을 하면서도 정주영 회장의 이런 면모는 잘 드러나지만 이때도 끼가 있었다. 바닥에서 자면 빈대에게 살을 뜯기므로 밥상에 올라가서 잠을 청했다. 그 방법은 한동안은 통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다시 빈대가 정주영의 살을 물어 뜯기 시작했다. 정주영이 가만히 보니 빈대들이 밥상다리를 타고 올라온 걸로 보였다. 정주영은 다시 꾀를 냈다. 이번에는 밥상다리마다 양동이 그릇을 놓고, 거기에 물을 채웠다.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하면 빈대들은 밥상을 타고 오르지 못할 것이다. 역시 정주영이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웬걸! 잠시 시간이 흐르니 빈대들이 다시 정주영의 몸을 물어 뜯기 시작했다. 정주영은 정말 의아했다. 

'아니 도대체 빈대들이 어떻게 밥상에 올라오는거야??'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하다가 문득 천장을 바라 보았다. 빈대들이 숙소의 벽을 타고 기어올라 천정으로 향한 후, 천정에서 정주영의 몸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본 정주영은 충격을 받았다.

'빈대도 죽을 힘을 다해 머리를 써서 방법을 찾는구나. 그래 경성(서울)으로 가자!'

정주영은 이 일화를 마음 속 깊이 새겼다. 자신 스스로도 교훈으로 삼았지만, 훗날 직원들을 혼낼 때도 의례 "빈대보다 못한놈들! 빈대도 머리를 쓴다!" 하면서 꾸짖었다고 한다.


정주영은 경성에서 막일을 하다가 신당동에 있는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취업한다. 그해 나이 19세였다. 정주영은 이 곳에서도 특유의 성실함과 뛰어난 일머리로 인해 주인의 눈에 든다. 주인 아들이 개차반

정주영이 복흥상회에서 자리를 잡아 갈 즈음 막일판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들이 놀러 온다. 미래에 세계적 부호가 될 정주영과 평범한 친구들의 대화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특히, 정주영이 강조하는 '주인의식'에 대해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요즘 일부 MZ 친구들과 함께 일하기가 힘들다는 볼멘소리와 비명이 주변 여기저기서 들린다.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라는 아주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부자가 될리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마저도 '받는 만큼도 못하는' 프리라이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조직에서 실제로 돈을 벌어 오는 직원은 극소수이며, 딱 받은 만큼 하는 직원이 그 다음이며, 대부분은 프리라이더이다. 이들은 구조조정 1순위다.

세상사람들은 다 눈이 달려있다. 특히 우리 인생을 바꾸어 줄 자본가와 인생 선배들도 MZ친구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그저그런 친구는 그저 그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겠지만 선배들의 눈에 띄면 인생이 바뀐다. 세상 모든 일은 사람이 도모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신뢰와 신용을 얻는 것은 중요하다.

MZ친구들에게만 꼰대처럼 잔소리를 해서 미안하다. 사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이를 먹고도 아직까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남에게 빌어 먹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마인드에 '주인의식'이 없다.

'어차피 주인이 있는 회사인데, 개처럼 굴러봤자 노예 아니냐?'라는 반문이 돌아 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과 결이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삼성전자에 다니면서 죽어라 열심히 한다고 삼성의 오너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혼신의 정성을 담아서 맡은 일을 내 것처럼 한다면 그 업무 중 쌓은 노하우와 철학 등 모든 것이 내 몸에 체득이 된다. 결국 길게 보면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런 모습을 누군가가 지켜 보고 있다가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경우도 아주 많다. 적어도 주인의식 없는 사람이 인생이 잘 풀리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매사 긍정적이고 주인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늘 기회를 주었다.

내가 지금 MZ라면 출세하기가 아주 쉬울 것 같다. 또래들이 엉망이니 나는 조금 정신차리고 100을 받으면 120만큼 꾸준히 해주면 그만이다. 얼마나 쉬운가? 아주 선배들과 임원들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기회를 봐서 내 회사를 만들어서 나갈 때도 다들 도와주려고 하지 않을까? 이건 비단 급여 생활자 뿐 아니라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도 모두 적용되는 원리다. 당장은 20의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그 20이 유무형의 자산이 되어 나에게로 돌아오는데, 이게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져서 돌아온다. 평판과 입소문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전파된다.

세상 인심은 아주 고약하다. 100을 받고도 90이나 105 정도를 해주면 사람들은 발길을 끊는다. 늘 경쟁자와 비교 대상이 된다. 그러나 100을 받고 120이나 150정도, 내친김에 200이나 300을 주면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 세상인심은 조용히 그를 향하게 된다. 골목에서 튀김 장사를 해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가게를 선택하는 기준을 생각해 보면 된다. '받은 만큼만 한다' 이건 전형적인 소탐대실이다. 사람이 약간은 손해를 보고 살 줄 알아야 된다. 손해보는 것도 기술이다.



정주영은 밤낮으로 성실하게 일했다. 가게를 정말 키워 볼 요량으로 기존의 불합리한 시스템도 개선해 나갔다. 정주영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만들어 해서 했고, 업무량도 늘어났다. 그리고 가게는 날로 번창했다. 가게 주인도 아니고 일개 일꾼임에도 불구하고 정주영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가게를 장악해 나갔다.

훗날 복흥상회의 업무량이 너무 늘어나자 주인 어른은 결국 가게를 정주영에게 넘기게 된다. 어차피 주인 어른은 아들이 개차반이라 골치 아파서 가게를 접을 생각도 있었다. 쌀가게의 진짜 주인이 된 것이다. 이때 복흥상회를 인수할 자금도 평소 정주영을 눈여겨 본 사채대부 오윤근 어른이 빌려준다.

다시, 돌아가서. 정주영은 사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면서도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거짓말을 하고 복흥상회에 취업하였다. 일단 취업은 하고 봐야 했기에 일종의 취업 사기를 친 셈이다.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밤. 정주영은 배달 심부름 하나를 맡게 된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니 곤욕이었다. 양동이로 퍼붓듯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정주영은 수십 번 넘어졌다. 그러는 과정에서 실제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정주영은 이렇게 말했다.

"결국 자전거를 실제 탈 수 있게 되었으니 취업사기는 아니지 않소?"


복흥상회 취업 전 잠시 인천 부두에서 막일을 할 때. 정주영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당시 막일꾼들은 하루치 일당을 받으면 그날 술값으로 탕진하고, 남은 돈은 그 마저도 노름으로 날렸다. 

하지만 정주영은 막일로 버는 돈을 꼬박꼬박 모았다. 그리고 늘 책을 읽었다. 왜냐하면 정주영은 자신의 인생을 막일꾼에서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 정주영의 가슴과 이상은 늘 미래를 향해 있었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가진 것이 없고 어두웠던 시절 정주영의 미래를 보여주는 유일한 창은 책이었다. 책을 통해서 꾸준히 쌓아 둔 막대한 지식과 지혜들은 정주영의 삶을 개척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책을 읽는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삶을 사는 사람들 중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영상은 찾지 못했지만 몇가지 에피소드가 더 있다. 정주영은 쌀가게를 정리하고 손에 약 천 원의 돈을 손에 쥐게 된다. 자동차 수리점이 돈이 된다고 해서 시작하려는데 천 원으로는 자금이 너무 모자랐다. 정주영은 오윤근 어른에게 찾아가 거금 3천 원을 빌린다. 오윤근 어른은 돈이 더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다. 오윤근 어른은 정주영에게 차용증도 받지 않았다. 그저 정주영의 몸뚱아리와 신용만 믿고 돈을 내주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정주영의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서비스 사업은 꽤 잘 되었다. 그러나 화재로 전소되고 만다. 이때 정주영은 도저히 일어설 답을 찾지 못하다가 뻔뻔하게도 다시 오윤근 어른을 찾아간다.

"자네 전에 빌려간 3,000원도 갚지 못하지 않았나?" 오윤근 어른이 이렇게 묻자 정주영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어르신이 일전에 빌려주신 3,000원에 이자까지 받으시려면 제가 다시 사업을 할 수 있게 돈을 빌려 주셔야 합니다. 아니면 저는 여기서 그냥 망하는데, 어르신께 돈을 갚을 방법이 요원해집니다."

오윤근 어른은 곧장 정주영에게 회생할 자금을 내 주었다.

다시 타임머신을 저기 미래로 이동해서. 꽤 큰 기업을 일군 정주영은 이제 정계와 줄도 있었고, 한국을 대표하는 건설사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정주영은 텅텅 빈 황무지를 보면서 늘 뚝딱뚝딱 공장이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한강을 보면서는 '독일 라인강? 웃기고 있어. 우리 한강이 더 대단한 강이야' 하면서 한강에 건물이 빽빽하게 늘어선 모습을 상상했다. "라인강의 기적? 우리라고 못해? 우리도 해보자 한강의 기적!"이라고 외치며 직원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2022년 11월 3일
송종식


2015년 5월 3일 일요일

호암자전 - 삼성 창업자 호암 이병철 자서전

어떤 세력이 규모를 키우면 반드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집단이 생긴다. 그 과정에서 세력은 사회에 밝은 면을 남길 뿐 아니라 어두운 면을 남길 수도 있다. 삼성이 남긴 밝은 면 뿐 아니라 어두운 면도 어느 정도는 숙지하고 있다.

그리고 자서전은 기본적으로 저자의 주관에 따라 쓰여지고 실제와 다른 왜곡된 내용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부분들을 충분히 감안해 가며 본 자서전을 읽었다.

<출처:네이버 책>
어쨌거나 이 책은 매우 가치 있다. 회사를 만들고, 이를 한 국가의 최고 규모로 키운 선배 기업가이자 투자가가 직접 쓴 글을(물론 이병철 전 회장님의 구술을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장님이 손으로 받아썼지만) 단돈 25,000원에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시대가 준 큰 혜택이다. 만나기도 힘든 재벌 총수인 데다가 이미 돌아가셔서 만나려도 만날 수 없는 창업자의 생각을 안방에 앉아서 흡수하는 재미는 쏠쏠하다. 25,000원에 이런 귀한 경험을 거저 먹는다는 생각도 들고... 큰 인물들의 자서전을 읽으면 숨겨놨던 야망도 싹터서 더 없이 좋다.

호암자전은 원래 비매품이다. 가족과 지인들을 위해 소량만 인쇄를 했고 현재 남아 있는 책은 몇 권 없다고 한다. 비매품 원본은 중고품 시장에서 35만 원까지 거래가 되고 있다.

재벌 창업자들 앞에서 실패를 논하지 말라(?)


많은 창업자들이 롤모델로 꼽는 정주영 회장님. 아마 실패의 대명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일것이다. 잘 나가는 쌀가게 복흥상회는 키워 놨더니 중일전쟁으로 쌀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문을 닫았다. 이후 인수한 자동차 수리 공장은 인수 한지 한달도 안돼 불에 타서 전소해버리고, 재건해 영업이 좀 된다 싶으니 일본이 기업정리령을 내걸고 회사를 빼앗어버렸다. 몇 번씩 빈털터리가 되면서도 새로이 사업을 일구는 저력은 후배 기업가들에게 귀감을 주고 있다.

소작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정주영 회장님과 달리 대대로 부유한 집안이었던 이병철 회장님은 별로 실패를 안 했을 것 같은 이미지다. 하지만 책을 보니 이병철 회장님 역시 무수한 실패를 경험한 인물이었다. 특히 회사를 만들어만 놓으면 국가에 몰수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기업 경영의 의지가 꺾일 만도 하다. 그런데도 계속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회사를 키운다. 조용하지만 저돌적인 인물이다.

이병철 회장님의 실패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중일전쟁으로 식산은행의 대출이 중단, 토지사업이 청산됨
  • 남북전쟁 중 삼성물산공사를 공산당에게 몰수당하고 빈털터리로 대구에 피난
  • 삼성이 소유했던 한일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이 국가에 몰수돼 국유화 됨
  • 서구에 대규모 차관 약속까지 받아놓은 세계최대규모의 비료공장 건설이 국내 정치 상황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감
  • 전쟁 당시 세법인 순이익의 120% 세율을 감당하지 못해 세금 납부에 문제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탈세 및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혀 수배자가 됨
  • 10년에 걸쳐 숱한 시련과 장애물을 넘어가며 건립한 세계최대의 한국비료 지분을 전량 국가에 헌납(?) 당함
  • 국가에 헌납할 한국비료 지분 51%를 채우기 위해 동양생명의 지분, 동양화재보험 지분, 현 한진빌딩 대지 등을 매각
  • 인장을 갖고 있던 한 직원이 삼성 전체 재산의 1/3을 횡령
  • 동양방송(TBS)이 강제로 국유화 돼, KBS에 합병됨

돈 몇 푼을 잃었다고 목숨까지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정주영 회장님이나 이병철 회장님의 시련을 보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느껴진다.

사업 패턴


전 후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당시 제일제당을 설립하면서 3백산업에 투신한다. 제일제당은 공장을 가동하자마자 수요가 폭발해서 삼성이 자본을 급격하게 축적하는 계기가 된다.

이병철 회장님의 사업 전략은 대부분이 이런 패턴이다. 1) 큰 수요가 확실한 시장을 찾는다. 2) 해외차관이나 정부 지원 등 외부 자금을 유치한다. 3) 공장 건설에 착수한다. 4) 자본을 축적한다. 5) 큰 수요가 확실한 시장을 다시 찾아본다.


특별할 것 없는 흔한 사업 패턴이다. 다만 자세히 뜯어보면 이병철 회장님의 몇 가지 독특한 성향이 보인다. 1)번 과정에서 엄청난 리서치를 동반한다. 각계 전문가는 모조리 만나서 의견을 청취하고, 활자는 모두 읽고, 필요하다면 해외 탐방도 적극적으로 한다. 공장 건설을 결의하기까지 1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만큼 리서치는 꾸준하고 집요하게, 그리고 철저히 하는 성격인 것 같다.

신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의했다면 모든 것을 건다. 차관도 최대한 받고 규모는 최대를 지향한다. 주식투자자로 치면 얻을 수 있는 모든 레버리지를 얻어 한 종목에 집중하는 투자자랄까.

사업 진행 과정에서는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원칙을 철저히 지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수들이 모든 사업 과정에 본인이 개입해 업무를 진행하는 반면에 최고수 기업인들은 여지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일을 믿고 맡기고 시스템이 일을 처리하도록 만든다. 이병철 회장님의 경우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쓰지를 않고, 쓰기로 결정한 사람은 믿고 큰 일을 모두 맡기는 위임 경영을 잘 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은 빠른 속도로, 그리고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분명하지만 시스템이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하므로. 위임 경영의 포인트는 시대 흐름과 사업을 보는 눈이고, 무엇보다 사람을 보는 눈을 갖추어야 한다. 사람을 등용하는 것, 그리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기업 경영 최고의 난이도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분명 이병철 회장님의 용인술이 뛰어났음을 증명한다.

사업의 지분을 대량으로 취득하고 모든 실무는 시스템과 구성원들에게 맡기고 본인은 실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매 분기나 매해 사업의 결산과 중요사항을 보고 받는다. 이런 사업 방식은 워런버핏과 비슷한 면이 보인다. 차이라면 버핏은 자신이 신규로 시작한 사업은 투자업뿐이다. 버핏은 기존 사업을 인수하는 형태로 몸집을 불렸다. 이병철 회장님은 자신이 신규로 사업을 시작한 케이스가 많기는 하다. 어쨌든 이병철 회장님의 사업 패턴을 보면 사업가이기도 하지만 투자가에 가까운 면모도 보인다.

기억에 남는 구절


  • 의심이 가거든 사람을 고용 말라.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그리고 고용된 사람도 결코 제 역량을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을 채용할 때는 신중을 기하라. 그리고 일단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
  • 벗이란 묘한 것인가 보다. 마산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공동출자자 외에는 벗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사업이 번창함에 따라 친구가 늘어갔다. 그러나 부동산에서 일단 큰 실패를 겪자 그렇게 많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한 사람 떠나고 두 사람 떠나고 하더니 대구에서 양조업에 착수하면서부터 또다시 한두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 그러나 친구들과 격의 없는 사이가 된 다음에도 나에게 분명히 충고를 해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누구나 귀에 거슬리는 말은 듣기 싫어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귀에 거슬리는 충언을 삼가게 된다. 소원해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고, 편하게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역시 충언을 하기 싫어한다. 그래서는 참다운 벗이 못 된다. 충언을 서슴지 않는 벗이 참된 벗이다. 참된 벗을 만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 어떤 사업이건 실패의 위험은 뒤따른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것은 처음부터 실패의 여지가 있다는 불안을 안고 착수하는 것이다. 100%의 자신이 없으면 애초에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속에 불안을 품은 채 착수하면 주저하여 전력투구를 못 하게 된다.
  • 빈곤과 청빈을 판별하지 못하고, 마치 남루한 옷을 걸치는 것이 청렴의 증좌인 양 여기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남이 진취적으로 무슨 일에 도전하는 일에는 왈가왈부의 비평을 많이 하면서도, 스스로 도전해 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한편 기회만 있으면 남의 덜미를 잡고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획책하기도 한다.
  • 조선 중엽부터 싹튼 그칠 줄 모르는 사색당쟁에만 골몰하였던 관계로, 좌정관외격인 우를 범했고, 유약퇴영의 정신과 부정부패의 씨를 배태케하여, 국민의 이익을 등지는 무정부상태의 혼비를 거듭했다. 마침내 후반 50년에는, 선진 강국의 침략을 막지 못하여 일본의 힘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일본은 우리를 그들 본국 경제를 위한 식민지 경제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현대국가로서의 경제발전상 가장 중요했던 시기 36년간을 후진국의 경제 테두리 속에 얽매어 두고 말았다.
  • 고전적 코스를 따를 시간이 없다. 1770년대의 영국 산업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서, 약 200년 전의 코스를 하나하나 밟아 내려올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는 너무나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무슨 비약적인 수단이나 방법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우리의 빈곤이나 산업 구조의 낙후성을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과감하게 그 순서를 바꾸어 대기업에서부터 출발하여, 중소기업으로 내려가는 방식을 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농업을 건너 뛰고 공업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농촌을 구제하는 길은 오히려 과감한 외자도입에 의한 공업화를 통해서만 가능함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
  • 아시아 반공 보루국으로서 수원 태세를 견실히 확립하고 조야가 합심하면 차관 기금의 10%에 해당하는 1억 달러의 차관을 매해 확보 가능하다. 운영 실적이 좋으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10년간 10억 달러의 차관 획득도 꿈은 아니다. 한일 회담이 원만히 타결되면 일본에서 10년간 6억 달러 도입도 큰 문제는 안 될 것이다. 그동안의 움직임을 보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10년 동안 5억 달러의 차관을 확보하는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를 합치면 10년간 대략 21억~23억 달러의 외자를 도입할 수 있다. 그리고 국제 흐름으로 보아 전기, 도로, 수도, 와사 등 민생에 직결되는 사회 공공사업의 개발 자금 차관은 비교적 용이하므로 덴마크, 네덜란드, 포르투칼 등 각국에서 1,700만 달러씩 도합 약 1억 3천만 달러를 차관으로 도입하는 것도 좋으리라 믿는다.
  • 이상에서 말한 외자도입이 원활하게 달성되면서 3년만 지나면, 이미 건설 완료한 공장에서는 수익이 나오게 된다. 그것을 매년 2억 달러 내외로 보고 이 자금을 다시 민간사업에 재투자 할 것 같으면 10년 동안 15억~20억 달러에 해당하는 공장건설 자금을 확보하는 결과가 된다.
  • 이 구상이 제대로 진척되면 36억~43억 달러의 투자가 가능하다. 이를 약 40억 달러로 추정하면 4백만 달러 규모의 공장 1천 개를 건설할 수 있다. 그렇다면 투자 총액의 70%에 해당하는 연간 생산증가는 곧 같은 액의 GNP증가를 기대할 수 있으므로, 1인당 국민 소득은 현재 50달러에서 100달러로 무난하게 두배가 증가할것이다.
  • 또한 이들이 한 공장에 500명씩 고용한다고 치더라도 고용 증가는 50만명에 달할 것이며, 부양가족을 5인 평균으로 친다면 250만 명이며, 그 밖의 하청 중소공장과 유통단계에서의 고용을 합치면, 무려 500만 명의 고용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 즉, 농가 인구를 공장에 흡수하여 그들의 생활이 보장받을 수 있게 될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장 하나에 부과되는 세금을 200만 원으로 추정하면 세금 총액이 20억원이 되는 바, 이렇게 되면 정부의 세수입은 배증한다. 공무원의 급료도 배액 이상 지불할 수 있게 되어서 점차로 부정부패도 일소될 수 있고, 사회도 명랑하고 건전하게 될 것이다. 1,500만 농민의 1/3에 해당하는 500만명을 공업에 흡수함으로써, 현재 420평에 불과한 1인당 경지면적을 630평으로 확대시켜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한편, 농산물 생산비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비료나 농기구 등을 국내 공장에서 염가로 생산 공급하는 공업화를 촉진함으로써, 농민들이 간접적으로 공업화에 의한 파급 혜택을 받도록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추어야 한다. 이것부터 우선 인식하고 나서 사업을 운영할 때는 첫째, 국내외의 정세 변동을 정확히 통찰해야하며 둘째,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본인의 능력과 그 한계를 냉철히 판단해야 하고 셋째,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로 피해야 하며 넷째, 직관력의 연마를 중시하는 한편 제2, 제3의 대비책을 미리 강구하여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고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청산하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 모사는 재인이고 성사는 재천이라고 한다. 희망이나 꿈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에너지이며, 언제나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성취하면서 살아가려는 인간의 통성이기도 하다.


 목차

  • 서 序
  • 제 1 편 청소년 시절 
    • 제 1 장 한일합방 해에 출생 
    • 제 2 장 서당에서 학교로 
    • 제 3 장 결혼, 그리고 도쿄 유학 
    • 제 4 장 세계 공황하의 대학시절 
    • 제 5 장 졸업증서 없이 끝난 학업 
  • 제 2 편 사업에 투신 
    • 제 1 장 사업 투신의 결의 
    • 제 2 장 정미·운수업으로 출발 
    • 제 3 장 2백만 평의 대지주로 
    • 제 4 장 삼성의 모체 삼성상회 설립 
    • 제 5 장 고향에서 해방 맞아 
    • 제 6 장 사업보국의 신념을 굳혀 
    • 제 7 장 이승만 박사의 추억 
    • 제 8 장 삼성물산공사의 설립 
    • 제 9 장 해방 후의 첫 일본방문 
    • 제 10 장 6·25 동란 발발 
  • 제 3 편 수입 대체산업 
    • 제 1 장 빈손으로 대구에 피란 
    • 제 2 장 제조업을 결의 
    • 제 3 장 제일제당 설립 
    • 제 4 장 국내기술로 공장 완성 
    • 제 5 장 제일모직 설립 
    • 제 6 장 모든 것을 우리 손으로 
    • 제 7 장 유니언 잭 고지에 태극기를 
    • 제 8 장 산업자본의 형성 
  • 제 4 편 사회의 격동 
    • 제 1 장 시은의 대주주로 
    • 제 2 장 한국비료의 건설 추진 
    • 제 3 장 차관도입 교섭에 성공 
    • 제 4 장 120%의 세제 
    • 제 5 장 5·16 혁명 최고회의에 서한 
    • 제 6 장 박정희 부의장과의 첫 대면 
  • 제 5 편 우리가 잘 사는 길 
    • 제 1 장 경제인협회 초대 회장으로 
    • 제 2 장 울산공업단지의 조성 
    • 제 3 장 통화개혁과 삼분파동 
    • 제 4 장 [우리가 잘 사는 길] 기고 
    • 제 5 장 비료공장건설을 재추진 
    • 제 6 장 유솜과 일본업계의 반대 
    • 제 7 장 미쓰이물산과 차관교섭 
    • 제 8 장 한일회담의 이면 지원 
    • 제 9 장 세계최대의 단일 비료공장 
    • 제 10 장 정치기류에 휘말린 ‘한비사건’ 
  • 제 6 편 문화사업 
    • 제 1 장 문화재단 설립 
    • 제 2 장 교육과 도의문화의 진흥을 
    • 제 3 장 호암미술관 설립 
    • 제 4 장 매스컴의 경영 
    • 제 5 장 동양방송의 영상은 사라지고 
    • 제 6 장 용인자연농원에 건 꿈 
    • 제 7 장 위암 수술을 받고 
  • 제 7 편 전자중화학공업 
    • 제 1 장 전자, 그리고 중화학공업 시대로 
    • 제 2 장 조선 분야에 진출 
    • 제 3 장 플랜트 생산체제 갖추어 
    • 제 4 장 유화산업과 방위산업 
    • 제 5 장 생명보험과 백화점의 경영 
    • 제 6 장 한국의 얼굴 호텔신라 
  • 제 8 편 삼성의 장래 
    • 제 1 장 새로운 경영기법을 찾아서 
    • 제 2 장 반도체 개발을 결의 
    • 제 3 장 삼성반도체에 내일을 건다 
    • 제 4 장 기업은 영원한가 
    • 제 5 장 창업과 수성 
    • 제 6 장 보스턴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 제 9 편 취미 편력 
    • 수집으로 개성을 안다 
    • 생활 속의 골프 
    • 국악과 서예로 정심 길러 
    • 건축미에 매료되어 
    • 《논어》, 인간형성의 근원 
  • 후기 
  • 호암연보
<목차 출처 : 네이버 책>


저자에 대해


저자 이병철 전 회장님은 1910년 2월 12월에 경남 의령에서 출생했다. 다소 방탕하고 무의미한 10대와 20대를 보냈다고 본인 스스로 회고했다. 1936년에 첫 사업을 시작했고, 1938년 3월에 <삼성상회>라는 상호를 걸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는 기업을 창업했다. 1953년에 제일제당 설립, 1954년에 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이후에 한국비료 등 굵직한 사업을 진행했다. 타계하기 전에는 천문학적인 자본과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하이 리스크 산업인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면서 한국 경제가 IT기반 국가로 가는 기틀을 마련했다. 삼성그룹을 창업한 1세대로서 삼성그룹을 국내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었다. 슬하에 4남 6녀를 두었고, 삼남 건희에게 사업을 승계했다. 1987년 11월, 7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인은 폐암이다.

2015년 5월 3일
송종식